아렌트와 네그리 — 모자이크에서 개념의 길로
이 기록의 출발점
이 글의 원문은 철학과 석사과정의 현대유럽철학연습 수업에서 작성한 약 19쪽 분량의 세미나 글이다. 원제는 Coincide between Arendt and Negri이며, 저자는 서두에서 아렌트와 네그리의 직접적인 이론적 접점을 찾기 어렵다고 인정한 뒤 파편적인 개념들을 모자이크·몽타주·큐비즘의 방식으로 병치하겠다고 선언한다.
원문을 다시 읽은 뒤 나온 질문은 단순히 과거 글의 오류를 교정하는 데 있지 않았다. 개념들의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글에서 이제 반대로 개별 개념들로 걸어나가며, 각각의 사상가·논쟁·사례가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공개 지식망으로 남기는 것이 목적이다.
원문의 목소리
원문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다음과 같은 취지다.
- 아렌트는 여전히 모호했고 네그리의 다중은 아무리 읽어도 뚜렷한 접점이 보이지 않았다.
- 그래서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를 파편적 개념의 연계로 만회하려 했다.
- 문자 텍스트의 모자이크, 영화적 몽타주, 개념에 대한 큐비즘적 시각을 지향했다.
- 하나의 사건 안에 존재하는 복수의 시점을 보며, 아렌트가 시점의 전체주의마저 경계한 것이 아닌지 물었다.
이 자기고백은 논문의 약점에 대한 선제적 변명이면서 동시에 가장 흥미로운 방법론적 선언이다. 문제는 파편성 자체가 아니라, 개념을 연결한 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충분히 따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한 줄 평가
이 글은 엄밀한 비교철학 논문이라기보다 2009년 한국의 정치적 현재를 아렌트와 네그리 사이에 통과시킨 철학적 몽타주다.
강점과 약점은 모두 개념적 비약에 있다. 비약 덕분에 글은 생생하고, 영화·대중문화·정치적 사건들이 철학의 사례가 아니라 철학이 실제로 작동하는 장면이 된다. 하지만 근본악에서 악의 평범성으로, 아이히만에서 밀그램으로, 밀그램에서 다중으로 이동할 때 개념적 차이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
질문 뒤의 질문
표면적 질문은 아렌트와 네그리가 어디에서 일치하는가다. 그러나 글 전체를 지배하는 실제 질문은 조금 다르다.
정치적 무력감을 느끼는 개인은 어떻게 다시 행위 가능성을 믿을 수 있는가.
아이히만, 신자유주의적 주체, 군중, 제국의 비신체적 전쟁은 모두 사유와 판단이 중지된 삶의 변형들이다. 반대편에는 소크라테스, 소피 숄, 비즐러, 촛불의 참여자들, 봉하마을의 다성적 애도가 놓인다. 원문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한 악이 아니라 사유하지 않음이며, 찾고 싶어 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역사 밖에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능력이다.
글의 가장 강한 자기수정
원문은 처음에는 다중을 희망으로 읽지만, 후반부에서 황우석 사태와 영화 〈디 워〉를 둘러싼 집단적 열광을 거치며 스스로 질문을 수정한다.
- 다중은 희망이다.
- 그러나 연결된 대중은 황우석·〈디 워〉를 둘러싼 배타적 군중이 될 수도 있다.
- 그렇다면 다중과 군중은 무엇으로 구별되는가.
- 자율성과 네트워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판단, 공통감, 타인의 관점, 책임의 문제가 필요하다.
따라서 원문에서 발전시켜야 할 핵심은 아렌트와 네그리의 유사성이 아니라 다중의 자율성에 판단의 규범을 부여하려는 시도다.
새롭게 압축한 중심논제
네그리·하트의 다중론은 포스트포디즘적 생산 속에서 특이성들이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정치적 잠재력을 설명하지만, 연결된 집단이 민주적 다중인지 배타적 군중인지를 판별할 충분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 아렌트의 복수성, 사유, 확대된 정신, 공통감은 이 판단의 공백을 보완할 수 있다. 그러나 아렌트의 정치와 사회의 구별도 노동·돌봄·신체·소통이 정치와 생산의 공통 조건이 된 현실에서는 수정되어야 한다. 민주적 다중은 사회적 삶과 정치의 얽힘을 인정하면서 복수성·판단·책임·비지배를 지속적으로 구성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더 짧게 쓰면 이렇다.
자유로운 연결만으로 민주주의는 오지 않는다. 다중은 자신을 제한하고 판단하며 제도화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고, 제도는 다중의 차이를 하나의 국민적 의지로 지우지 않아야 한다.
아렌트와 네그리가 서로에게 제기하는 질문
| 네그리·하트가 아렌트에게 묻는 것 | 아렌트가 네그리·하트에게 묻는 것 |
|---|---|
| 정치적 자유를 노동·돌봄·불평등·신체적 필요와 분리할 수 있는가 | 차이를 유지하며 연결된 집단이면 무엇이든 민주적 다중인가 |
| 공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은 어디에 있는가 | 다중은 판단·책임·사실검증·소수자 보호를 어떻게 수행하는가 |
| 사회적인 것을 정치에서 배제하면 누가 공적 공간에 등장할 수 없는가 | 순간적 정동은 어떻게 지속적 조직과 제도로 번역되는가 |
| 생산과 재생산에서 이미 일어나는 협력은 왜 정치로 인정되지 않는가 | 대표·전략·결정·집행의 문제를 누가 책임지는가 |
즉시 교정해야 할 주장
| 원문의 주장 | 교정과 보강 |
|---|---|
| 아렌트가 근본악을 악의 평범성으로 교체했다 | 단순 교체가 아니다. 근본악은 전체주의가 인간의 자발성과 복수성을 파괴하는 구조를, 악의 평범성은 아이히만이라는 행위자의 사유·판단 실패를 분석한다. 서로 다른 분석 수준이다. |
| 아이히만은 아주 평범한 정상인이었다 | 아렌트는 모든 정상인이 상황만 주어지면 학살자가 된다는 일반법칙을 제시하지 않았다. 거대한 악행과 행위자의 진부한 언어·사고 사이의 불균형을 지적했다. |
| 아이히만은 단순히 명령에 복종했다 | 그는 유대인 이송을 열성적으로 수행했고 때로는 명령 이상으로 행동했다. 책임 없는 톱니바퀴가 아니라 조직의 목적을 자신의 과업으로 받아들인 능동적 추종자로도 보아야 한다. |
| 밀그램 실험이 악의 평범성을 입증한다 | 실험실 권위와 홀로코스트를 직접 등치할 수 없다. 조건별 차이, 과학적 목적과의 동일시, 실험의 신빙성에 대한 의심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
|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 역할과 상황의 힘을 입증한다 | 현재는 확립된 증거로 쓰기 어렵다. 연구진의 지시, 요구특성, 자료선택과 통제 부재가 확인되었다. |
| 살은 개인이 자유의지로 숭고한 선택을 하는 능력이다 | 네그리·하트의 살은 개인적 도덕성보다 국가와 자본이 완전히 조직하지 못한 집합적·사회적 생산능력을 가리킨다. |
|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인격화된 다중이다 | 한 사람을 복수적 집합인 다중이라 부르기 어렵다. 소크라테스는 다중이 군중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시민적 사유와 대화의 모델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
nunc stans는 지금-여기의 정치적 삶이다 | 아렌트에게 이는 일상적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사유의 서 있는 현재에 가깝다. 정치적 현실참여의 동의어가 아니다. |
| 보드리야르가 이라크전은 발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 정확히는 1991년 걸프전을 다룬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다. 2003년 이라크전과 구별해야 한다. |
| 포드는 노동자가 자동차를 살 수 있도록 임금을 올렸다 | 널리 알려진 신화에 가깝다. 이직률 감소, 생산성, 노동규율이라는 효율임금의 성격과 사생활 감시가 함께 있었다. |
| 푸코는 신자유주의의 억압적 통치술을 폭로했다 | 푸코는 경쟁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개인을 자기 인적자본의 기업가로 구성하는 통치이성을 분석했다. |
| 공통감은 관용과 조화를 이루는 합의다 | 공통감은 합의된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다른 사람의 가능한 관점에 노출시키는 확대된 사유와 소통 가능성이다. |
| 모든 삶은 정치와 일치한다 | 삶이 정치적 조건에 연루된다는 것과 모든 사적 경험이 곧 정치행위라는 것은 다르다. 연결과 동일시를 구별해야 한다. |
1. 근본악과 악의 평범성
서로 다른 분석 수준
아렌트의 근본악은 수용소와 전체주의가 인간의 권리만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고 새로 시작하는 능력을 파괴한다는 문제다. 악의 평범성은 그 구조를 수행한 아이히만에게 악마적 깊이가 아니라 진부한 언어, 자기판단의 부재, 타인의 관점을 표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나타났다는 문제다.
따라서 악의 평범성은 근본악을 폐기한 개념이라기보다, 근본악이 현실에서 수행될 때 행위자에게 반드시 심오한 사탄적 동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발견으로 읽는 편이 좋다.
슈탕네트 이후의 아이히만
베티나 슈탕네트가 아르헨티나 시절의 자료를 검토한 뒤, 아이히만에게 분명한 반유대주의적 이념과 자기정당화가 있었다는 비판이 강화되었다. 이 사실은 아렌트의 논제를 완전히 폐기하기보다 다시 묻게 한다.
- 이념적 확신과 사고의 진부함은 반드시 반대인가.
- 강한 이념이 오히려 자기 판단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완제품 언어로 작동할 수 있지 않은가.
- 무사유는 신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념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상태일 수 있지 않은가.
관료적 언어와 비신체적 전쟁
나치의 관료적 완곡어법은 가치가 제거된 중립언어가 아니었다. 폭력적 가치를 행정처리처럼 위장하는 언어였다. 학살은 특별처리로, 강제이송은 재정착과 수송으로 번역되었다. 네그리·하트의 원격전쟁 분석과 연결할 공통점은 가치중립성이 아니라 책임의 탈감각화다. 행위자는 자신의 결정이 타인의 신체에 남기는 결과를 언어·통계·좌표·기술적 매개 속에서 보지 못한다.
관련 노트: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 한나 아렌트, 베티나 슈탕네트, 크리스토퍼 브라우닝
2. 밀그램과 스탠퍼드 실험
65퍼센트라는 대표 수치의 문제
밀그램의 유명한 수치는 여러 조건 중 하나다. 닉 해슬럼, Steve Loughnan, 지나 페리가 21개 조건 740명을 종합한 연구에서는 최대전압까지 진행한 전체 비율이 43.6퍼센트였다. 실험자의 정당성·일관성·거리, 피해자와의 거리와 친밀성, 주변 사람들의 불복종이 결과를 바꾸었다.
Perry 등의 미공개 자료 재분석에서는 피해자가 실제로 고통받는다고 강하게 믿은 참가자들이 더 낮은 충격 수준에서 멈추는 경향이 나타났다. 높은 충격을 준 일부 참가자는 실험이 실제가 아니라는 의심을 했을 수 있다.
따라서 밀그램은 평범한 사람이 명령만 받으면 자동으로 악을 행한다는 일반법칙이 아니라 권위, 동일시, 상황해석, 실험에 대한 믿음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제한된 사례다.
능동적 추종
Reicher와 Haslam의 해석은 수동적 복종보다 과학적 목적과 실험자에게 자신을 동일시하는 능동적 추종을 강조한다. 이 해석은 아이히만을 무기력한 톱니바퀴보다 체제의 목표를 자신의 일로 받아들인 수행자로 읽게 한다.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티보 르 텍시에의 아카이브 조사는 간수들에 대한 구체적 지시, 요구특성, 불완전한 자료, 선택적 서술을 드러냈다. 이 실험은 상황이 사람을 자동으로 잔혹하게 만든다는 증거에서 내려야 한다. 오히려 연구자의 기대와 권위가 참가자의 행동을 연출하고, 그 서사가 대중적 신화가 되는 사례로 읽을 수 있다.
관련 인물: 스탠리 밀그램, 지나 페리, 닉 해슬럼, 티보 르 텍시에
3. 복수성은 다양성이 아니라 실천이다
소피 로이돌트의 연구가 강조하듯, 아렌트의 복수성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는 경험적 사실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나타나 말하고 응답하며 자신의 관점을 타인의 관점 앞에 노출하는 공적 행위에서 복수성이 현실화된다.
이 점은 다중과 다양성을 구분하게 한다. 이질적인 개인들이 물리적으로 모였거나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민주적 복수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복수성은 차이를 제거하지 않으면서 공통세계를 만드는 수행이다.
관련 노트: 아렌트와 네그리 - 복수성과 다중, 민중 대중 군중 다중, 소피 로이돌트
4. 다중·민중·대중·군중
| 개념 | 통일 원리 | 차이의 처리 | 정치적 특징 |
|---|---|---|---|
민중 people | 주권과 대표 | 차이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 | 하나의 의지로 대표됨 |
대중 mass | 소비·미디어·수동성 | 차이가 무차별성 속에 가라앉음 |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 |
군중 crowd | 정동의 전염과 밀집 | 차이가 집단감정에 잠식될 수 있음 | 폭발적이지만 불안정 |
다중 multitude | 협력과 공통적인 것 | 특이성을 유지 | 하나가 되지 않고 공동행동 |
이 네 범주는 고정된 사람 유형이 아니다. 같은 집합이 관계의 방식에 따라 다중과 군중 사이를 오갈 수 있다. 따라서 다중은 정체성보다 실천, 관계, 책임, 제도화의 질로 판단해야 한다.
관련 노트: 민중 대중 군중 다중,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민주적 다중의 판별 기준
5. 살과 신체
하트·네그리에게 유기적 신체는 상위기관이 부분들을 통제하는 통일체의 은유다. 살은 아직 하나의 기관체계로 고정되지 않은 관계적·생산적 잠재력이다. 따라서 소피 숄이나 영화 〈타인의 삶〉의 비즐러가 내리는 개인적 결단은 우선 아렌트의 판단·탄생성·새로운 시작으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그 결단이 다른 사람들의 행위능력을 증대시키고 새로운 협력관계를 만들 때 사회적 살의 문제로 이동할 수 있다. 개인적 영웅주의와 집합적 존재론을 먼저 분리한 뒤 다시 연결해야 한다.
관련 노트: 삶정치와 공통적인 것,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6. 비르노의 전도 — 정치적 능력이 노동에 포획되다
파올로 비르노는 자신의 논리가 아렌트와 반대이며 대칭적이라고 명시한다.
- 아렌트: 20세기 정치가 제작과 노동을 모방했다.
- 비르노: 포스트포디즘 노동이 정치행위의 특징을 흡수했다.
포스트포디즘 노동은 타인 앞의 수행, 언어와 소통, 관계조정, 우발성 대응, 새로운 과정의 시작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자의 해방이 아니다. 정치적 능력들이 임금노동 안에서 왜곡되고 전제적으로 사용된다.
더 불편한 결론은 정치적 능력이 이미 노동 안에서 소진되기 때문에 고유한 정치행위가 불필요한 복제품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중은 자동으로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탈정치화된 다중일 수도 있다.
관련 노트: 노동 행위 지성 - 비르노의 전도, 파올로 비르노, 포드주의 포스트포디즘 신자유주의
7. 다중론의 목적론과 조직 문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자본주의적 생산 안에서 사회적 차이들이 저절로 공통의 정치주체가 된다는 내재성의 낙관을 비판한다. 노동자·페미니스트·이주민·환경운동·지역공동체의 요구는 자동으로 하나가 되지 않으며 때로 충돌한다.
다중에게 필요한 것은 네트워크뿐 아니라 다음과 같다.
- 요구의 번역
- 공통 이름의 구성
- 갈등 조정
- 전략과 우선순위
- 책임 있는 결정
- 지속적 조직
공통적인 것을 생산한다고 공통의 정치의지가 자동으로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피에르파올로 무두는 이탈리아 사회센터·기층노조·환경운동·아나키스트·제노바 시위의 실제 실천을 검토하고, 네그리의 열린 네트워크가 운동의 공간적·조직적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평가한다.
관련 노트: 구성권력 제도 규범 생산, 민주적 다중의 판별 기준, 피에르파올로 무두
8. 스피노자는 제도와 다중을 단순 대립시키지 않는다
산드라 필드는 네그리가 스피노자를 통해 제도 없는 다중의 민주주의를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스피노자에게 제도는 다중의 힘을 억압하는 외부장치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 정념을 구조화한다.
- 상호 파괴적 충동을 억제한다.
- 공동의 힘을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통로화한다.
- 순간적 합의가 무너져도 정치관계를 보존한다.
따라서 질문은 다중과 제도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제도가 다중의 힘을 소외시키고 어떤 제도가 그 힘을 보존하고 증가시키는가다.
관련 노트: 바뤼흐 스피노자, 산드라 필드, 구성권력 제도 규범 생산
9. 탈주에서 규범 생산으로
티머시 레이너는 구성권력과 구성된 권력을 순수하게 대립시키면 사회운동이 법과 제도를 바꾸는 방식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사회운동은 제도에서 탈주하기만 하지 않는다. 새로운 문제를 공론화하고, 권리를 명명하고, 법적 언어를 바꾸며, 의원·판사·관료에게 영향을 준다. 운동과 제도는 접촉하면서 서로 변형된다.
Rayner가 강조하는 common name은 서로 다른 욕망을 하나의 동일성으로 녹이지 않으면서 공통 방향을 제공한다. 전쟁 반대, 이윤보다 인간, 생명권 같은 이름은 다양한 요구가 결집하는 규범적 중심이 된다.
다중의 정치는 제도 바깥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차이를 유지하며 공통의 규범을 만드는 번역과 오염의 과정이다.
관련 노트: 티머시 레이너, 구성권력 제도 규범 생산, 공통감과 확대된 심성
10. 20년 뒤의 다중 — 디지털 테일러주의
Anton Jäger와 Jan Overwijk는 하트·네그리가 유연노동, 디지털 생산, 창조성과 소통의 자본화, 수평주의적 정치를 잘 포착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시장의존성·사회권 후퇴·노조와 정당의 쇠퇴·노동자의 교섭력 약화·국민국가와 우익 포퓰리즘의 귀환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플랫폼과 알고리즘은 감독자를 제거하면서 측정과 통제를 더 세밀하게 만들었다. 다중은 해방된 인지적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조직적 보호막을 잃고 알고리즘으로 관리되는 프롤레타리아일 수 있다. 생산적 자율성과 조직적 무력화가 같은 현실의 두 측면인 셈이다.
관련 노트: 포드주의 포스트포디즘 신자유주의, 안톤 예거와 얀 오버베이크
11. 포드주의·케인스주의·신자유주의
구분
- 테일러주의: 노동과정을 측정·분해하고 구상과 실행을 분리한다.
- 포드 생산체제: 이동식 조립라인, 표준화, 대량생산, 노동규율, 고임금정책.
- 거시적 포드주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생산성·임금 연계, 노사타협, 복지국가.
- 케인스주의: 유효수요·투자변동·불완전고용을 다루는 거시경제 이론.
포드의 5달러 일당은 노동자가 차를 사도록 베푼 순수한 복지가 아니라 이직률과 결근을 줄이고 생산성과 규율을 높이는 효율임금이었다. 노동자의 가정생활과 음주·도덕성에 대한 감시도 결합했다.
푸코의 신자유주의
미셸 푸코에게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물러나는 정책이 아니다. 경쟁은 자연상태가 아니라 법과 제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생산된다. 개인은 교육·건강·가족·경력을 투자수익의 관점에서 관리하는 자기 기업가로 구성된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외부명령에 복종하는 죄수만이 아니라 스스로 성과를 측정하고 실패를 자기책임으로 돌리는 관리자다. 자유는 억압의 반대가 아니라 통치의 기술이 된다.
관련 노트: 포드주의 포스트포디즘 신자유주의, 미셸 푸코, 삶정치와 공통적인 것
12. 2008년 촛불 — 자발성, 조직, 돌봄
갑자기 나타난 순수한 다중이 아니다
안지은의 2024년 에든버러대 박사논문은 2002·2004·2008·2016~2017 촛불을 장기 비교한다. 촛불문화제는 야간집회 규제를 우회하기 위해 추모와 허용된 문화행사를 결합한 전략적 발명이었다. 축제성도 순수한 자생성이 아니라 법·경찰·운동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시위 레퍼토리다.
2008년 첫 집회 다음 주에는 노동·농민·환경·언론개혁·여성·교육·소비자·협동조합·야당·온라인 커뮤니티와 1,000개가 넘는 단체가 참여한 전국연합이 구성되었다. 기존 조직이 네트워크에 대체되지 않았고, 조직이 자발성을 단순 장악한 것도 아니다. 두 방식은 충돌하고 조정하며 서로 배웠다.
광장을 유지한 돌봄
현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돌봄 인프라가 만들어졌다.
- 유모차 부대와 공동육아
- 무료 커피와 컵라면
- 김밥 배포
- 의료지원팀
- 구호물품팀
- 온라인 모금과 자원봉사
다중을 가능하게 한 것은 촛불이라는 숭고한 상징만이 아니라 김밥·커피·의료·아이 돌봄이었다. 공통적인 것은 추상적 생산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광장에 계속 머물 수 있게 하는 재생산노동으로 드러났다.
청소년과 취약성
강지연은 청소년들이 광우병 공포를 학교급식, 경쟁교육, 의료민영화, 비정규직, 선택권의 불평등과 연결했다고 분석한다. 부유층은 다른 음식을 선택할 수 있지만 학생·군인·저소득층은 단체급식에서 선택할 수 없다는 취약성이 정치적 감각이 되었다.
인터넷은 정당의 언어로 번역되기 전의 불만과 유머·패러디를 유통했다. 그러나 시위가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목표로 이동하면서 청소년의 관심이 약해지기도 했다.
저항과 종속의 역설
팡희경은 촛불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순수한 저항도, 단순한 소비자 공포도 아니라고 분석한다. 식품안전·웰빙·고용불안·시장개방·디지털 카니발·이질적 욕망이 접합되었으며, 건강권과 공공성을 요구하면서도 개인의 건강과 안전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언어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관련 노트: 광장과 촛불 - 자발성 조직 돌봄, 안지은, 강지연, 유혜종, 팡희경
13. 광장과 제도
2008년의 논쟁은 광장정치와 정당정치를 양자택일처럼 다뤘다. 2016~2017년 촛불은 광장의 압력이 국회의 탄핵소추, 헌법재판소의 판단, 조기 대선으로 번역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광장은 제도를 대신하지 않았고 제도도 광장을 단순히 대표하지 않았다. 광장의 압력과 제도적 절차가 서로를 변화시키며 결과를 만들었다. 민주주의는 광장이나 제도 가운데 하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의 불완전한 번역에서 발생한다.
Bennett와 Segerberg의 연결행동론은 개인화된 참여와 디지털 공유가 집단정체성 없이도 동원을 만들 수 있음을 설명한다. 제이넵 튀펙치는 디지털 운동이 빠르게 확장되지만 장기 조직이 축적하던 협상·전술변경·갈등조정·대표교체의 능력을 건너뛸 수 있다고 지적한다.
관련 노트: 광장과 촛불 - 자발성 조직 돌봄, 제이넵 튀펙치, 구성권력 제도 규범 생산
14. 공통감은 합의가 아니다
아렌트의 공통감은 같은 의견을 가지는 능력이 아니다.
- 가능한 타인의 관점을 상상한다.
- 사적 이해에서 잠시 거리를 둔다.
- 판단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검토받을 수 있게 한다.
- 동의를 강제하지 않고 설득한다.
- 하나의 공통세계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조건을 유지한다.
따라서 공통감은 다중을 자동으로 선하게 만드는 도덕장치가 아니다. 다중의 판단을 타인의 관점에 노출시키는 절차적·규범적 시험이다.
아렌트의 판단론은 완성되지 않았고 행위자의 판단과 관객의 회고적 판단 사이에도 긴장이 있다. 이 한계를 인정한 상태에서 공통감을 다중의 의사결정 원리로 가져와야 한다.
관련 노트: 공통감과 확대된 심성, 한나 아렌트, 산드라 필드
15. 민주적 다중의 판별 기준
다중은 네트워크 구조나 자발성만으로 군중과 구별되지 않는다. 최소한 다음을 물어야 한다.
- 내부 이견을 허용하는가.
- 소수자의 권리와 발언 공간을 보존하는가.
- 지도자·상징·집단정체성을 비판할 수 있는가.
- 반대자의 존재를 제거하려 하지 않는가.
- 사실을 검증하고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가.
- 행동의 결과와 피해에 책임지는가.
- 참여자 사이의 권력·자원·기술적 영향력 차이를 드러내는가.
- 순간적 정동을 지속 가능한 조직과 제도로 번역할 수 있는가.
- 자신도 선동과 쾌락에 사로잡힐 수 있음을 인정하는가.
- 반대자와도 하나의 사실세계 안에서 말하려는가.
관련 노트: 민주적 다중의 판별 기준, 민중 대중 군중 다중, 공통감과 확대된 심성
16. 노무현, 애도, 기억
노무현을 다중과 제국 사이의 개인으로만 표현하면 네트워크적 동원이 대표권력으로 번역될 때 생기는 모순이 한 인물의 비극으로 압축된다.
- 노사모·희망돼지·인터넷 선거운동의 네트워크성
- 정당과 선거를 통한 대표권력 획득
- 대통령직이라는 국민국가적 주권 수행
- 파병과 FTA라는 국제질서·신자유주의 정책
- 탄핵반대 촛불과 임기 후 정치적 고립
- 죽음 이후 애도와 기억정치
다중의 참여로 집권한 권력이 반드시 다중의 정치를 지속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자는 자신을 탄생시킨 네트워크와 국가·자본의 제약 사이에서 독자적인 권력위치를 형성한다.
봉하마을에서 젊은이들이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애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가 다른 애도방식일 수 있다고 수정한 원문의 움직임은 중요하다. 집합적 애도의 정동은 공동체를 순간적으로 출현시키지만 자동으로 민주적 에토스가 되지 않는다.
파토스가 에토스로 이어지려면 다음이 필요하다.
- 반복되는 기억의 의례
- 복수의 이야기
- 비판을 허용하는 애도
- 영웅화와 신화화에 대한 경계
- 조직과 제도
- 일상적 실천
- 후대에 전달될 기록
민주적 기억은 비판을 애도의 배신으로 간주하지 않을 때 공통세계를 만든다.
17. 모네의 성당과 정치적 복수성의 한계
모네의 연작은 동일한 대상을 여러 빛과 시간에서 보는 복수성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그러나 미학적 복수성을 정치에 그대로 옮기면 권력관계가 사라진다.
- 그림들은 서로의 발언권을 억압하지 않는다.
- 실제 정치적 관점은 다른 관점의 생존을 파괴할 수 있다.
- 모든 관점이 같은 자원과 미디어를 갖지 않는다.
- 인종주의와 파시즘을 여러 관점 가운데 하나로 단순 관용할 수 없다.
복수성을 보존하려면 복수성 자체를 파괴하려는 힘에 경계를 그어야 한다. 다원주의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 무판단이 아니라 다원주의의 조건을 지키기 위한 판단을 요구한다.
18. nunc stans와 현재성
nunc stans는 지금 당장 현실에 참여하라는 구호가 아니다. 아렌트에게 이는 사유가 일상적 시간의 흐름에서 잠시 물러나는 서 있는 현재와 관계한다.
현재적 정치행위를 말하려면 다음 개념이 더 적절하다.
- 세계사랑
amor mundi - 공적 등장
- 탄생성과 시작
- 함께 행동할 때 생기는 권력
- 약속과 용서
- 기억과 이야기
아렌트가 요구한 것은 과거와 미래를 버리고 현재에 몰입하는 삶이 아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약속하면서 지금 함께 존재하는 사람들과 세계를 구성하는 삶이다.
19. 삶과 정치의 관계
원문은 취직·소비·여행·음식까지 정치와 연결되어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 통찰은 유지하되 연결과 동일성을 구분해야 한다.
- 소비가 권력관계에 연루되어도 모든 구매가 곧 정치행위는 아니다.
- 삶 전체가 정치적 조건에 놓여 있어도 모든 사생활이 공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정치와 사생활의 구별이 무너지면 국가나 운동이 개인의 내밀한 삶 전체를 요구할 수 있다.
따라서 결론은 다음처럼 조정할 수 있다.
모든 삶은 정치적 조건에 연루되어 있지만, 모든 삶을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주디스 버틀러의 집회론은 아렌트와 네그리를 연결한다. 광장에 나타난 몸은 공적 발언을 수행하는 동시에 주거·음식·돌봄·안전에 의존하는 취약한 몸이다. 공적 자유와 신체적 필요는 분리되지 않지만, 몸들은 하나의 유기체로 융합되지 않고 서로 다른 취약성을 지닌 채 함께 나타난다.
방법론을 다시 세우기
몽타주는 개념적 비약을 미리 용서받는 면책조항이 아니라 다음 원칙을 지켜야 한다.
- 표현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개념을 연결하지 않는다.
- 같은 문제에 서로 다른 답을 준다는 점에서 병치한다.
- 공통점과 함께 환원되지 않는 차이를 밝힌다.
- 사례는 이론의 장식이 아니라 이론의 한계를 시험한다.
- 연결 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정리한다.
여기서 몽타주는 서로 다른 개념들의 외형적 유사성을 나열하는 방법이 아니다. 아렌트와 네그리를 하나의 이론으로 종합하려는 대신, 한 이론이 다른 이론의 맹점을 드러내도록 병치하는 방법이다. 네그리의 다중은 아렌트의 정치 개념이 배제한 노동과 사회적 생산의 차원을 드러내고, 아렌트의 복수성과 판단론은 네그리의 다중론이 충분히 해명하지 못한 민주적 판단과 책임의 문제를 제기한다. 일치는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가 보존된 채 발생하는 부분적 교차를 뜻한다.
2009년 당시와 후대 연구 구분
원문 당시에도 사용할 수 있었던 교정과 비판
-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예루살렘의 아이히만』·『정신의 삶』·칸트 정치철학 강의
- 하트·네그리의 『제국』과 『다중』
- 비르노의 『다중의 문법』과 노동·행위·지성의 전도
- 라클라우의 내재성 비판
- Timothy Rayner의 구성권력/제도권력 비판과 규범 생산
- Pierpaolo Mudu의 실제 이탈리아 운동과 다중론의 거리
- 브라우닝의 『평범한 사람들』
- 밀그램 조건별 차이
- 포드의 효율임금 연구
- 2008년 촛불의 네트워크·허브·기존 조직 연구
- 걸프전과 이라크전의 구분
후대에 새롭게 보강된 자료
- 슈탕네트 이후 아이히만의 이념적 확신 재평가
-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아카이브 공개 이후 비판
- 밀그램 21개 조건 메타분석과 실험 신빙성 재분석
- Sandra Field의 스피노자 대 네그리 논쟁
- Sophie Loidolt의 실현되는 복수성
- Bennett·Segerberg의 연결행동론
- Tufekci의 네트워크 운동 역량 분석
- Butler의 집회 수행성·취약성·애도
- 2008년 촛불의 장기적 레퍼토리·조직학습·돌봄 연구
- 『Assembly』의 지도력·전략·전술 재검토
- 『제국』 20년 이후 디지털 테일러주의와 조직 없는 프롤레타리아 비판
후대 연구는 과거의 글을 무지했다고 심판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당시 글 안에 이미 있었지만 충분히 말할 수 없었던 질문을 더 정확히 완성하는 자료다.
새 목차 제안
- 일치가 아니라 긴장 — 몽타주와 성좌
- 무사유와 판단 — 근본악, 악의 평범성, 능동적 추종
- 복수성과 다중 — 특이성, 차이, 공적 실현
- 신체·살·탄생성 — 개인적 결단과 집합적 생산능력
- 아고라·광장·메트로폴리스 — 소크라테스와 촛불
- 삶정치적 생산과 신자유주의적 통치
- 군중과 다중의 경계 — 황우석, 〈디 워〉, 촛불
- 대표제와 절대적 민주주의 — 광장·정당·의회·법원
- 공통감과 민주적 다중 — 합의가 아닌 확대된 판단
- 애도·기억·에토스 — 노무현과 봉하마을
- 결론 — 삶과 정치의 동일성이 아니라 분리 불가능한 긴장
글을 다시 쓴다면 지켜야 할 한 문장
연결을 하나 줄이고, 그 연결의 차이를 두 번 더 생각하라.
그러나 지금 이 글의 가치는 연결이 많았다는 사실에도 있다. 개념을 너무 빨리 연결했기 때문에 생긴 오류가 있지만, 바로 그 과잉 연결 덕분에 아렌트의 판단과 네그리의 다중, 촛불의 광장과 돌봄, 신자유주의적 노동과 무사유가 하나의 문제공간에 모였다.
원문이 다중을 믿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군중을 두려워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그 불안은 이론적 미숙함이 아니라 정확한 정치적 감각이었다. 다중이 민주적이기 위해 무엇을 스스로 제한하고 훈련해야 하는가. 정말 무서운 것은 권력이 다중을 억압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다중이 자신의 정동을 곧바로 진리라고 믿는 순간이다.
개념별로 걸어나가기
- 아렌트와 네그리 - 복수성과 다중
-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
- 공통감과 확대된 심성
- 민중 대중 군중 다중
- 노동 행위 지성 - 비르노의 전도
- 구성권력 제도 규범 생산
- 삶정치와 공통적인 것
- 포드주의 포스트포디즘 신자유주의
- 광장과 촛불 - 자발성 조직 돌봄
- 민주적 다중의 판별 기준
- 아렌트와 네그리 관련 인물 지도
- 아렌트와 네그리 참고문헌 지도
주요 출처
전체 서지와 URL은 아렌트와 네그리 참고문헌 지도에 분야별·시기별로 정리했다.
-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The Human Condition; Eichmann in Jerusalem; The Life of the Mind; Lectures on Kant’s Political Philosophy.
- Michael Hardt & Antonio Negri, Empire; Multitude; Commonwealth; Assembly.
- Paolo Virno, A Grammar of the Multitude.
- Ernesto Laclau, “Can Immanence Explain Social Struggles?” https://doi.org/10.1353/dia.2004.0008
- Sandra Field, “Democracy and the Multitude.” https://doi.org/10.3167/th.2012.5913103
- Timothy Rayner, “Refiguring the Multitude.”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issue-files/rp131_article3_refiguringthemultitude_rayner.pdf
- Pierpaolo Mudu, “Where Is Hardt and Negri’s Multitude?” https://doi.org/10.14288/acme.v8i2.830
- Haslam, Loughnan & Perry, “Meta-Milgram.” https://doi.org/10.1371/journal.pone.0093927
- Perry et al., “Credibility and Incredulity in Milgram’s Obedience Experiments.” https://doi.org/10.1177/0190272519861952
- Thibault Le Texier, “Debunking the Stanford Prison Experiment.” https://doi.org/10.1037/amp0000401
- Ji-Eun Ahn, How Candlelight Vigils Matter in Post-democratic South Korea? https://era.ed.ac.uk/items/07dd6f4b-1f0d-4a7f-aa0b-c4e4da89a451
- Jiyeon Kang, “Exuberant Politics on the Internet.” https://ijoc.org/index.php/ijoc/article/download/6738/2159
- Huikyong Pang, The 2008 Candlelight Protest in South Korea. https://digitalcommons.usf.edu/etd/4742/
공개와 인용에 관한 주의
이 노트는 원문을 대신하는 판본이 아니라 원문을 둘러싼 비평·교정·후속 연구 지도다. 직접 인용은 확인된 원문에 한정하고, 그 외 설명은 요약과 의역이다. 페이지 번호는 번역판과 판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실제 논문 개정 시 사용 판본을 기준으로 다시 대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