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에르의 가면
여성성, 불안, 인정 — 그리고 뒤늦게 등장하는 니체
발표는 성공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도대체 무엇이 실패했다는 말인가
조앤 리비에르의 「가면으로서의 여성성」(1929)은 단순히 ‘여성은 여성답게 보이려고 연기한다’는 글이 아니다. 성공한 발표자가 왜 발표 이후에 안절부절못하는지, 그가 왜 자기 능력을 평가할 사람보다 ‘아버지처럼 느껴지는’ 남성의 관심을 구하는지, 그 안전장치가 왜 여성성의 형태를 취하는지를 묻는다. 나아가 여성성과 가면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했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완전히 발달한 여성성’을 정의한다. 이 스스로의 균열을 따라가야 논문의 힘과 한계를 함께 볼 수 있다.1
여기서 ‘철학’은 리비에르가 독립된 철학 체계를 세웠다는 뜻이 아니다. 임상 장면으로부터 진짜/가짜, 욕망/방어, 인정/불안, 개인 환상/사회적 규범을 둘러싼 질문을 끌어내는 사유를 뜻한다. 원문의 사례, 리비에르의 해석, 오늘의 사회적 확장, 후대 비판을 서로 바꿔 쓰지 않을 거야. 니체의 가면은 끝쪽 한 절에서만 비교한다.
처음 대화는 “리비에르의 가면으로서의 여성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줘”라는 질문으로 열렸다. 그 답변이 붙잡은 여덟 갈래—발표 후 불안, 여성성이라는 방어, 고의적 속임수와의 차이, 진짜/가짜 구분, 회의실의 가상 사례, 순응과 생존의 양면성, 도언·버틀러의 후대 독해, 세 가지 비판—를 여기서는 삭제하지 않고 1929년 논문과 새 자료로 다시 점검한다. 먼저 나온 답변의 비유나 가상 사례를 논문의 직접 인용으로 승격시키지 않는 것도 이 작업의 일부야.
1929년 논문의 문장과 사례를 처음부터 끝까지 나란히 읽고 싶다면 한국어 전문 작업 번역을 열면 돼. 원문 PDF는 그 페이지의 외부 링크에서 읽고, 여기서는 번역과 해설의 목소리를 구분한다.
1. 논문의 출발점 — 능력이 아니라 능력 이후의 불안
리비에르는 먼저 당시 어니스트 존스가 나누어 놓은 여성 성적 발달의 범주와, 그 사이에 있는 유형을 이야기한다. 그녀가 고른 대상은 지적·직업적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전통적 잣대에서는 아내·어머니·살림 담당자로 ‘완전한 여성성’을 갖춘 듯 보이는 여성이다. 그 분류의 언어는 1920년대 정신분석의 언어이며, 지금의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재단하는 표가 아니다. 왜 사회적으로는 모순 없이 잘 사는 듯한 사람이 특정 장면 뒤에 반복적으로 흔들리는가가 논문의 실제 도입 질문이다.2
중심 사례의 여성은 미국 출신으로 말하고 쓰는 일을 잘했고, 결혼생활과 일상도 원만하다고 기술된다. 청중 앞에서는 논리적으로 토론을 이끈다. 하지만 행사 후에는 밤새 자신이 부적절한 일을 하지 않았는지 불안해하고, 남성에게서 칭찬이나 관심을 받아야 안도한다. 처음에는 일에 대한 칭찬을 찾는 듯하나, 리비에르가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은 연장자 남성들의 성적 관심을 불러오는 행동이다. 상대는 꼭 그의 업무 능력을 평가할 권위자는 아니다. 그가 아버지상에 가까운지가 더 중요하다.3
이 불안은 발표를 망쳤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잘했기 때문에 위험해졌다는 것이 그녀의 해석이다. 발표는 아버지와의 동일시, 아버지와의 경쟁, 무의식적 환상에서는 아버지의 남근을 빼앗아 그의 자리를 차지하는 행위로 연결된다. 남근을 여기서 현대인의 일반적인 야망에 대한 깔끔한 은유로만 바꾸지 말자. 리비에르는 거세·오이디푸스 갈등·보복 환상을 실제 정신분석적 설명 장치로 사용한다. 동시에 그것이 그 자리에 있던 남성들이 실제로 그 여성을 해치려 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관찰된 행동과 분석가가 부여한 원인은 구분해야 한다.4
처음 대화가 던진 문장을 더 선명히 해보자. “내가 제대로 해냈는가?”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까지 잘해도 괜찮은가?” 성공은 실패의 반대말이지만, 이 사례에서는 불안의 반대말이 아니다. 그녀가 찾는 남성은 실제 발표 평가의 최고 전문가일 필요가 없었다는 세부가 이 차이를 드러낸다. 전문가의 채점이 아니라 보복하지 않을 사람의 표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쉽게 풀면 이렇게 된다. 능력을 보인다 → 자신이 아버지의 권력을 빼앗았다는 불안이 일어난다 → 남성의 호의를 확인하며 적이 아니라는 안전 신호를 만든다. 이는 리비에르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해석을 돕는 내 표현이야. 가면을 쓴다고 해서 속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는 뜻도 아니다. 원문은 당사자가 구애의 반복적 양상을 분석을 통해서야 알아차렸다고 기술한다.
그래서 미소나 옷, 친절을 보고 곧바로 ‘가면’이라고 판정해서는 안 된다. 같은 행동이라도 취향, 기쁨, 예의, 성적 욕망, 불안의 일부일 수 있다. 이 사례에서 먼저 볼 것은 발표라는 시간, 특정한 남성의 시선, 안심이 절박해지는 반복이다. 진단자의 자신감이 관찰 자료보다 커지는 순간, 임상은 오래된 성별 규범의 복도에서 길을 잃는다.
예컨대 누군가가 자기 주장을 분명히 한 뒤 반드시 사과를 덧붙이거나, 진지한 결론을 농담으로 마무리하거나, 상대의 기분을 확인해야 마음을 놓는다고 해보자. 이것만으로 가면을 입증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 행동을 하지 않을 때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떤 사람 앞에서 반복되는지를 물을 수는 있다. 원대화의 ‘일부러 남을 속이는 여성’과 ‘본인도 명료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방어’의 구별은 여기에 있다. 가면은 사기꾼의 본성에 붙인 딱지가 아니라, 반복되는 관계에서 어떤 불안을 견디게 해주는지 묻는 가설이다.
2. 꿈의 세부 — 가면은 무엇을 숨기는가
리비에르는 어린 시절 미국 남부에서 한 남성에게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환상, 그리고 그 환상과 닮은 꿈을 제시한다. 환상 속 여성은 공격자를 입맞춤과 사랑의 몸짓으로 진정시키려 하고, 결국 그를 사법 당국에 넘길 생각까지 한다. 꿈에서는 집에 혼자 있는 그가 소매를 걷고 빨래를 하며, 침입자의 성적 관심을 유도한다. 분석가는 그가 부모를 제거하고 집의 모든 것을 차지했다는 환상 속의 죄, 예상되는 부모의 보복, 피와 죄책감을 씻는 노동, ‘거세된 여자’로 자신을 위장하는 몸짓을 읽어낸다.5 그가 부모를 실제로 죽였다는 사건 보고가 아니다. 임상적 해석을 마치 범죄의 증거처럼 읽지 말자.
여기서 ‘여성스러운 일’을 택하는 행위는 무력함의 고백인 동시에 위험한 재산이 자신에게 없다는 시연이다. 리비에르의 도둑 비유를 바꾸어 말하면, 훔친 물건을 숨긴 이가 먼저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면서 자기 결백을 주장하는 꼴이다. 남성의 성적 호의를 끌어내는 일도 단지 사랑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보복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받고 싶은 일이다. 리비에르는 발표와 그 뒤의 구애를 우연히 이어진 두 장면이 아니라 하나의 강박적 ‘이중 동작’으로 읽는다. 남성적 힘을 과시한 뒤 여성적 복종을 보이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한 동작이 일으킨 불안을 다른 동작이 지우려 한다는 구조 때문이다.5
306쪽에서 독자가 당연히 묻게 될 말을 리비에르가 스스로 제기한다. 도대체 ‘진정한 여성성’과 가면을 어디서 나누는가 대답은 근본적이든 표면적이든 둘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사례의 여성에게 여성성의 능력이 없었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이 여성에게는 주된 발달 경로나 일차적인 성적 즐거움보다 불안을 피하는 장치로 사용된다고 설명한다. “가면과 진짜가 구별되지 않는다”와 “그 행동의 기능이 방어적이다”는 서로 다른 층위의 주장이다. 후자를 들어 전자를 곧장 취소하면 논문이 실제로 만든 균열을 놓친다.5
3. 한 사례 바깥의 세 장면 — 몸, 기술, 농담
307쪽 이후의 사례를 지나치면 가면이 추상적인 비유로만 남는다. 중심 사례의 여성은 늦게 결혼했고 성교와 오르가슴을 능동적으로 추구했다. 리비에르는 그 즐거움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상실한 자존감을 되돌려 받으려는 안도감이 섞여 있다고 분석한다. 분석 중 남편에게 향한 적대와 거세 환상이 떠오를 때 욕망과 성적 반응이 달라졌다는 서술도 있다. 이를 ‘여성의 성적 즐거움은 가짜다’로 요약하면 원문을 배반한다. 그녀는 실제 즐거움과 그것이 떠맡은 불안 조절 기능을 동시에 기술한다.6
또 다른 여성은 장인이나 수리공 앞에서 자신의 기술 지식을 감춘다. 제안은 능숙하지만 모르는 사람의 우연한 추측처럼 말한다. 평소의 유능한 생활과 특정 남성 전문가 앞의 서툰 몸짓이 벌어지는 자리에서 가면의 상황 의존성이 보인다. 대학에서 난해한 학문을 가르치는 여성은 동료 앞에서 유독 여성적인 복장을 고르고, 지식을 ‘진지한 주장’이 아니라 장난이나 농담으로 취급한다.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서 누이의 표식을 취해 성적 흥분을 얻는 남성 사례까지 제시된다. 리비에르는 가면의 기제를 여성만의 고정 속성으로 제시하는 데서 끝내지 않는다.7
그렇다고 이 세 사례를 현대 사회 전체에 그대로 복사할 수는 없다. 특히 누군가의 농담이나 겸손을 보고 숨은 성적 지향이나 거세 환상을 진단할 근거는 없다. ‘저 사람은 진짜 여성인가?’가 아니라 왜 어떤 장면에서 지식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해야 안전해지는가라는 질문이 지금에도 이어질 수 있다.
4. 어머니에게 돌려주려는 것 — 경쟁, 죄책감, 보상
흔한 요약은 아버지의 힘을 빼앗고 남성의 분노를 피하려 여성스러워진다는 데서 끝난다. 원문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리비에르는 먼저 이 환자가 아름답거나 지적으로 뛰어난 여성들과도 경쟁했고, 살림 능력과 지적 성취가 어머니와 다른 여성들을 능가하고 싶다는 욕망에 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당시 클라인의 초기 오이디푸스·구강적 공격성 가설을 가져와, 아이가 부모의 몸 안에 있다고 환상하는 젖·남근·아이 등의 대상을 빼앗고 손상하려 한다고 서술한다. 오늘의 생물학적 사실 서술이 아니라, 공격성과 공포를 해석하는 당대의 무의식적 환상에 대한 모델이다.8
그녀의 설명에서 부모 둘 다 빼앗길 수 있고 둘 다 되갚을 수 있지만, 어머니에 대한 공격과 어머니가 되갚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특히 크다. 그래서 환자는 아버지와 동일시해 얻은 능력을 어머니와 다른 여성들을 돕는 데 사용한다. 표면상 헌신과 돌봄이지만, 대가 없는 순수한 희생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감사와 ‘인정’이 충분히 돌아오지 않으면 분노가 폭발한다고 리비에르는 적는다. 도움을 통해 빚을 갚으면서 동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가 나임을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9 이것은 능력 있는 여성의 돌봄을 모두 이기적인 것으로 폭로하려는 진술이 아니다. 특정 사례에서 호의와 우월감, 보상과 지배가 같은 동작에 얽혀 있다는 임상적 독해야.
아버지에게 얻으려는 인정도 단순한 칭찬이 아니다. 312쪽에서 리비에르는 인정이 안심, 허가, 사랑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면죄라고 풀이한다. 아버지가 내가 가진 것을 승인하면 빼앗았다는 죄를 면할 수 있다고 여기는 환상의 논리다.10 그래서 발표 뒤 성취에 대한 평가보다 사랑받고 있으며 공격받지 않으리라는 보증이 더 절실해진다. 능력을 얻고도 그 능력을 쓸 자격을 승인받아야 하는 구조. 여기서 권위는 성취를 평가할 뿐 아니라, 성취한 사람의 죄책감을 사해주는 판사 자리를 차지한다.
5. 가장 급진적인 한 문장과 스스로 걸어 잠근 문
306쪽에서는 진짜 여성성과 가면이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데 313쪽에서는 리비에르가 다시 ‘완전히 발달한 여성성’과 ‘영원한 여성적인 것’을 묻는다. 이성애적 여성성을 수용, 남성에 대한 존경, 자기희생, 생식기의 성숙과 연결하며 ‘정상’ 여성과 동성애 여성의 발달을 구분한다.11 306쪽의 도발을 313쪽이 없던 일로 돌릴 수 없고, 반대로 313쪽을 슬그머니 삭제해 리비에르를 현대 젠더이론의 완성자로 만들 수도 없다. 가면 뒤 본질을 찾지 않겠다는 문장과, 발달된 본질을 다시 정하려는 욕망이 한 논문에 공존한다.
원래 대화에서 특히 남겨야 할 경고도 이것이다. “가면 뒤에 사실 남성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논문의 ‘남성성’은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분석적 명명이지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의 젠더 정체성을 결정하는 검사가 아니다. 게다가 왜 지성과 경쟁심을 먼저 남성의 소유물처럼 이름 붙이는가 여성이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남성의 것을 훔쳐서 능동적이라고 해석한다면, 이론이 설명하려는 규범을 스스로 다시 제조하는 셈 아닐까. 버틀러가 후일 파고드는 균열은 바로 여기에 있다.12
일상적 언어로 두 도식을 구분하면 이렇다. **‘여성이라는 내면 → 여성다운 몸짓’**이라고 보는 도식과, **‘몸짓을 여성답다고 읽고 반복해서 승인하는 관계 → 내면에 여성성이 원래 있었다는 확신’**이 생긴다고 묻는 도식이다. 후대의 두 번째 질문을 리비에르가 1929년에 전부 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313쪽에 도달하면 그녀 자신이 첫 번째 도식에 다시 기대기 때문이다. 통찰을 과장하지 않는 것과 그 통찰을 버리지 않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
6. 지금의 장면으로 확장하되, 원문을 덮지 말자
가상의 상황을 하나 놓아보자. 여성 기술자가 회의에서 설계의 결함을 짚고 난 뒤 아는 척했다며 자신을 낮추고, 오히려 많이 가르쳐달라고 청한다. 진짜로 배우고 싶은 것이라면 그냥 정직한 말이다. 하지만 상대의 반감을 피하려 자신의 실력을 지우는 것이라면 리비에르의 질문을 비유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 유능하되 위협적이지는 말라는 이중 요구. 입을 열라고 해놓고 말의 끝에 스스로 지우개질을 하라는 명령이다. 이 예는 논문에 없는 가상 사례이며 실제 사람의 무의식을 진단한 사례가 아니다.
현대 사회심리학의 로리 러드먼은 1998년 실험들에서 여성의 자기홍보가 능력 평가는 높이되, 평가자의 성별과 목적에 따라 호감·채용 평가에는 비용이 생길 수 있다고 보고했다.13 이것은 ‘그런 반발이 사회적으로 있을 수 있다’는 별도의 근거일 뿐 리비에르의 구강적 환상이나 거세 불안을 실증했다는 뜻이 아니다. 리비에르는 주로 개인의 내적 가족극을, 후대의 사회적 독해는 인정을 배분하는 제도와 타인의 응답을 묻는다. 둘을 연결하되 합치지 않을 때 더 잘 보인다.
순응과 생존도 둘 중 하나를 고르는 투표가 아니다. 자기 주장을 농담으로 만들어야 활동할 수 있다면 그 방식은 규범을 재생산하면서도 당장 그 사람의 일할 자리를 지킬 수 있다. 그러므로 “왜 당당하게 말하지 못해?”는 그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왜 전문성이 인정받는 순간에, 관계의 안전을 별도로 증명해야 할까? 원래의 임상 모델을 해체하지 않고 사회적 조건을 묻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구분을 유지하는 일이다.14
7. 리비에르라는 사람도 가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리비에르(1883–1962)는 브라이턴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배웠고, 1916년 어니스트 존스, 1922년 프로이트에게 분석받았다. 그 경험을 토대로 프로이트 저작의 영어 번역가가 되었고, 영국 정신분석학회의 훈련 분석가(1930년부터)로 수전 아이작스, 존 볼비, 도널드 위니컷 등을 분석했다. 클라인의 생각을 명료하게 소개하고 영국의 논쟁 속에서 프로이트와 클라인 사이의 어휘를 조정한 것도 그녀의 작업이다.15
번역사가 니나 바크만이 공개한 연구 초록을 보면, 프로이트는 그녀의 번역 역량을 인정하며 존스에게 번역 편집자로 임명하도록 힘썼지만 그 직책을 두고 협상할 때 리비에르 본인을 참여시키지는 않았다.16 학회 전기에는 그녀가 프로이트에게서 환자보다 번역가로 여겨졌다고 서운해했다는 기록도 있다.15 이 둘을 곧바로 “그래서 그녀는 가면에 관해 썼다”는 자전적 해명으로 묶는 건 위험하다. 그 대신 말을 정확히 옮기는 사람의 권위와, 자기 위치를 스스로 말할 권리가 어긋난다는 제도적 긴장으로 남겨두자.
1929년 이후의 이론적 관심도 살펴보면 ‘가면’은 여성성만의 옷이 아니다. 1932년 「질투를 방어 기제로서」는 질투와 구강적 시기, 좌절을 다루고, 1936년 「부정적 치료 반응의 분석에 대한 기여」는 치료가 나아지려 할 때 왜 오히려 환자가 악화되는지를 묻는다.1517 리비에르는 프로이트가 쓰던 ‘치료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분석 불가능성에 대한 성급한 최종 판결로 받지 않는다. 환자에게 조직적 방어가 있다면 분석가가 그 방어를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함께 따져야 한다고 쓴다. 나아가 분석가 자신의 나르시시즘이 환자의 저항 앞에서 다치는 순간도 살핀다.17 1929년의 몸짓과 1936년의 치료 관계를 같은 메커니즘으로 동일시하면 안 되지만, 눈앞의 현상을 나쁜 성격으로 확정하기 전에 그것이 막고 있는 불안을 묻는 태도는 이어진다.
리비에르는 여성성과 치료에서만 일한 것도 아니야. 1945년 「사별한 아내」는 전쟁 중 배우자를 잃은 사람과 자녀의 관계를, 1952년에는 문학 작품과 입센의 『건축가 솔네스』를 통해 상실·수리되지 않은 내적 세계를 다뤘다.15 그녀의 영향은 저명한 한 문장만이 아니라 번역, 훈련, 클라인의 생각을 전달하고 변형하는 글쓰기, 치료의 난점을 새로 묻는 방식에 있다. 다른 분석가의 성취를 통째로 그녀에게 귀속할 수는 없지만, ‘가면 논문의 저자’만 남기는 것도 또 다른 가면이다.
8. 후대의 독자들은 같은 가면을 보지 않았다
라캉: 「남근의 의미작용」(1958)에서 가면은 타자의 욕망, 팔루스를 기표로 놓는 성적 위치의 문제로 이동한다. 리비에르의 꿈 속 남근을 그대로 상징계의 팔루스와 등치하지 말아야 해. 동일한 단어를 쓰더라도 무엇을 설명하려는지 다르다. 라캉의 문장도 가면이 ‘여성의 본질’을 규정해준다는 최종 답으로 인용할 게 아니라, 욕망과 사랑의 요구 사이에 생기는 틈을 따져볼 자료다.18
메리 앤 도언: 「영화와 가면: 여성 관객 이론화」(1982)는 병원의 발표자에서 영화관의 관객으로 장면을 옮긴다. 스크린에서 여성이 이미지로 제시될 때, 여성 관객이 그 이미지와 겹쳐져 ‘거리를 잃는’ 문제가 생긴다고 진단한다. 여성성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가장은 이미지가 자연스러운 본질이 아니라 만들어진 대상으로 보이게 해 관객과 이미지 사이의 거리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모든 여성적 연출을 자동으로 저항으로 만든다는 말은 아니다.19
처음 대화에서 든 설명용 가상 장면도 남겨두자. 카메라가 어떤 여성의 미소를 ‘당연히 여성적인 것’으로 훑고 지나갈 수도 있다. 반면 같은 몸짓을 지나치게 정교하게 반복해, 보는 이가 그 미소의 인공성을 알아차리게 만들 수도 있다. 후자에서는 가면이 이미지의 문법을 노출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것은 특정 영화의 장면이나 도언의 실증 자료가 아니라 그녀의 ‘거리’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한 예시이며, 관객 모두가 같은 거리감을 얻는다는 보장도 아니다.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의 ‘라캉, 리비에르와 가장의 전략’ 절은 더 단호하게 묻는다. 이미 있던 여성성이 나중에 가려지는가 아니면 되풀이되는 가면의 효과를 우리가 ‘여성성이라는 존재’로 읽는가 버틀러는 두 해석의 긴장을 펼치고, 여성에 대한 욕망이나 능동성을 남성적인 것으로 분류하며 배제하는 규범도 문제 삼는다. 수행성은 마음대로 옷을 갈아입듯 정체성을 골라 쓰는 자유가 아니다. 반복되는 규범의 안팎에서만 인정과 제재가 발생한다는 이야기다.1220
그러므로 원대화의 “내 안에 여성성이 있어 여성다운 행동을 한다”와 “반복되는 행동이 안정된 여성성의 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라는 대비는 유용한 입구이되 최종 결론은 아니다. 리비에르의 관심은 특정 불안을 관리하는 사례에 있고, 버틀러는 이미 ‘여성적’이라고 읽히는 행위와 욕망의 틀 자체를 심문한다. 배우가 무대에서 배역을 자유롭게 골라 입는다는 식의 비유는 제재받는 현실을 감춘다.
진 월턴: 원논문의 꿈 장면에서는 미국 남부의 흑인 남성이 위협자로, 백인 여성은 두려움과 유혹을 동시에 사용하며 마지막에는 그를 ‘정의’의 손에 넘길 사람으로 나타난다. ‘모든 여성의 방어’를 설명한다고 하면서 어느 여성의 역사적 위치와 어느 남성의 비인간화는 배경으로 밀어 넣었는가 월턴의 1995년 논문은 이런 인종적 각본을 리비에르 이후의 백인 페미니즘적 정신분석 독해까지 추적해 비판한다. 공개된 대학 서지와 원문을 대조했으며 월턴의 세부 논증 전체를 직접 검토한 것처럼 말하지는 않겠다.215
클로디아 래핑: 2022년 재독해에서는 가족 내부의 드라마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성별화된 몸, 트랜스의 위치가 문제 된다. 리비에르의 빈틈을 고치는 단일한 후속 이론이라고 부르지 말고, 누가 ‘그 몸’의 범위에서 빠졌는지를 다시 묻는 작업으로 읽자. 라캉, 버틀러, 월턴, 래핑은 같은 가면 뒤에서 동일한 답을 발견한 사람들이 아니라, 무엇이 지워졌는지 각각 다르게 본 독자들이야.14
이렇게 후대를 엮을 때도 영향의 직접성과 사후적 병치를 구분해야 한다. 인용과 수용이 확인되는 작업은 그것대로, 여기서 두 텍스트를 나란히 읽는 나의 연결은 나의 연결로 표시한다. 1929년 문장이 오늘의 모든 논의를 미리 ‘예언’했다고 말하면, 바로 그녀의 사유가 살아 있는 부분을 박제로 만들 테니까.
9. 가면을 비교할 때만, 니체를 불러오자
“가면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니체의 단일하고 보편적인 정식처럼 떠돌지만, 출처를 나누어야 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405 「가면」은 실제로 어떤 여성들은 속이 없고 가면일 뿐이라는 성차별적 문맥에서 말한다. 동시에 남성이 그런 여성의 ‘영혼’을 끝없이 찾는다고 쓴다. 이 구절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현대적 명제로 바꾸면 원문의 대상과 불편함이 사라진다.22
『선악의 저편』 §40에서 깊은 것은 가면을 사랑한다. 가면 뒤가 반드시 사기나 공허인 것은 아니다. §289에서는 동굴 뒤에 또 동굴이 있고 철학이 다른 철학을 가린다. 그러니 니체 자신의 서로 다른 가면도 하나로 말끔히 통합할 수 없다.23 비교하면 리비에르는 주로 가면을 쓰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사람을, 니체 §405의 마지막 문장은 내면을 찾아내겠다는 욕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드러낸다.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보여줘’는 어떤 관계에서는 진실의 요구가 아니라 타인에게 먼저 방어를 포기하라는 요구다. 이 대목은 두 저자의 동일한 ‘가면 철학’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짧은 비교다.
10. 가면을 벗기라고 명령하는 쪽은 누구인가
이제 지젝식으로 질문을 한 번만 더 비틀어 보자. 사회는 여성의 전문성을 장려하면서도, 그 전문성이 기존 권위의 자리를 흔들지 않는다는 사후 확인을 요구할 수 있다. 이건 1929년의 임상 사례를 오늘로 넓힌 비평적 독해이지 모든 여성에게 같은 무의식을 선고하는 법정이 아니다. 모순은 능력을 금지하는 대신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 관계의 안전까지 책임지게 한다는 데 있다. 환상은 심사자가 ‘진짜 여성성’을 판별할 수 있다는 믿음, 향유는 심사자가 가면에 속지 않았다며 얻는 폭로의 쾌감이다. 큰 타자는 실제로 한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누구도 단독으로 내린 적 없는 그 정도는 알아서 조절해야지라는 분위기일 수도 있다.
이때 원대화의 비판 세 가지가 남는다. 첫째, 능력과 공격성을 ‘남성성’이라 부르는 명명 자체의 문제. 둘째, 소수의 임상 사례에서 모든 여성의 친절·겸손·욕망을 진단하지 말 것. 셋째,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도 인종과 사회적 위치의 차이가 있어 백인 여성의 공포를 모두의 보편적 불안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 이 셋을 빠뜨리면 그럴듯한 지젝식 반전도 결국 또 하나의 보편적 ‘여성’ 가면을 만들어 버린다.221
하지만 폭로자의 자리에는 독자인 우리도 선다. 아솔 휴스는 일기, 가족 인터뷰, 편지 등을 토대로 1929년 ‘환자’의 묘사에 리비에르 자신의 경험이 반영됐다는 주장을 편다. 흥미롭지만 공개 초록만으로 환자의 신원을 확정할 수는 없다.24 “드디어 가면을 벗겨 진짜 리비에르를 찾았다”는 만족은 읽는 사람 자신의 가면일지도 모르지. 우리는 이미 정답을 가진 심판이 아니라 아직도 자꾸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다.
리비에르의 글을 닫기 전에 305–307쪽을 펴 보자. 발표 뒤 몸짓, 남부의 꿈, 빨래한 팔,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는 도둑,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농담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 그리고 313쪽으로 가서 방금 흔들렸던 ‘진짜 여성성’이 어떻게 다시 자리 잡는지 보자. 가면 뒤가 비었는지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누가 자기 능력을 쓴 뒤에도, 그 능력을 쓸 자격을 다시 허락받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야.
읽는 순서와 판본 주의
- 리비에르 1929년 논문 303–313쪽 전체의 순서를 따라 읽되 305–307쪽과 309–313쪽을 특히 나란히 본다. 원 학술지 서지는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 10권, 303–313쪽이다. 인터넷 재조판 PDF 표지의 ‘Vol 9’는 PEP 및 영국 정신분석학회 서지와 맞지 않고 본문에도 오탈자가 있으므로 원본 사진판으로 취급하지 않는다.1
- 리비에르의 1932년 질투 논문과 1936년 치료 반응 논문, 학회 전기를 통해 그녀의 작업 범위를 확인한다. 두 논문의 기제를 1929년 ‘여성성 가면’과 동일시하지 않는다.1715
- 도언 → 버틀러 → 월턴 → 래핑 순서로 질문이 임상, 관객, 정체성, 인종, 몸과 사회로 옮겨가는 것을 따라간다. 마지막에 니체 §405·§40·§289를 짧게 병치한다.25 접속 가능하다는 것과 재게시 허락이 있다는 것은 별개다.
미주와 출처
관련 노트
- 가면으로서의 여성성 - 조앤 리비에르 한국어 번역 — 303–313쪽 본문과 원문 각주 1–7의 한국어 작업 번역.
- 조앤 리비에르 — 전기와 다른 저작을 더 찾아볼 입구.
- 철학·비평 에세이 — 다른 문화비평 글.
이 글이 이어받은 대화 HTML의 문장·링크·원래 이미지 URL·전달용 안내문 전체는 비공개 원자료로 보존했다. 공개 글은 HTML을 전재하지 않고 질문과 논점·예시를 새로 검증해 재구성했다. 처음 답변에서 사용한 논문 링크의 ‘Vol. 9’ 표기는 정식 서지의 10권과 구분했고, 원래 이미지 링크는 저작권·표시 상태가 불확실해 확인 가능한 CC BY 4.0 사진으로 바꾸었다.
Footnotes
- 1.
Joan Riviere, “Womanliness as a Masquerade,”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 10 (1929), 303–313. PEP 서지·첫 쪽 (전체 읽기는 구독 필요). 온라인 재조판 원문 (표지 권수 오류·오탈자 주의). 확인: 2026-09-29. 원문 PDF는 이 사이트에 복제하지 않고 한국어 작업 번역만 별도 노트로 제공한다. ↩ ↩2
- 2.
Riviere 1929, 303–304쪽. 존스의 분류와 리비에르가 택한 ‘중간 유형’ 및 직업·가정의 묘사. PEP 서지. ↩ ↩2
- 3.
Riviere 1929, 304–305쪽. 발표 후 불안, 남성의 인정과 아버지상, 지적 작업에 대한 경쟁심의 연결. 서지. ↩
- 4.
Riviere 1929, 305–306쪽. 아버지와의 동일시, 경쟁, 거세·보복 환상. 이것은 분석가의 임상적 해석이지 외부인의 실제 보복 관찰 보고가 아님. ↩
- 5.
Riviere 1929, 306쪽. 도둑의 주머니 비유와 ‘진정한 여성성/가장’의 차이를 두지 않는 대목. 같은 글 306쪽의 미국 남부 꿈 장면 역시 다음 비판과 나란히 읽어야 한다. ↩ ↩2 ↩3 ↩4
- 6.
Riviere 1929, 307쪽. 성적 즐거움과 안심·자존감의 회복을 구분하는 사례. 환자의 모든 성적 즐거움을 부인한다는 의미가 아님. ↩
- 7.
Riviere 1929, 307–309쪽. 장인 앞에서 기술 지식을 낮추는 여성, 동료 앞에서 농담으로 강의를 처리하는 여성, 거울 앞에서 분장하는 남성의 세 보조 사례. ↩
- 8.
Riviere 1929, 309–310쪽. 여성 경쟁, 초기 구강적 공격성, 부모의 몸과 소유물을 둘러싼 환상. 클라인의 1928년 「Early Stages of the Oedipus Conflict」를 원문이 각주에서 참조. ↩
- 9.
Riviere 1929, 310–311쪽. 어머니에 대한 보상, 아버지와의 동일시, 다른 여성을 돕는 데 사용되는 능력과 감사·인정의 요구. ↩
- 10.
Riviere 1929, 312쪽. 인정이 안심·허가·사랑·면죄로 작동한다는 분석. 여기서 말하는 ‘판사’ 비유는 필자의 해석. ↩
- 11.
Riviere 1929, 313쪽. ‘fully-developed femininity’와 성숙한 이성애적 여성성의 서술. 306쪽의 언명과의 긴장은 이 글의 해석이며 리비에르 자신의 자기비판 진술이 아니다. ↩
- 12.
Judith Butler, Gender Trouble (1990; 인용한 판본은 후속판), 제2장 ‘Lacan, Riviere, and the Strategies of Masquerade,’ 특히 59–61쪽; 서지/참고용 PDF. 전문 파일 재게시·장문 인용 없음. ↩ ↩2
- 13.
Laurie A. Rudman, “Self-Promotion as a Risk Factor for Women: The Costs and Benefits of Counterstereotypical Impression Management,”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74, no. 3 (1998), 629–645, Rutgers 연구정보·초록, DOI. 세 실험의 결과를 공개 초록 범위에서 설명. 리비에르의 정신분석적 기제를 입증한 연구가 아님. 확인: 2026-09-29. ↩
- 14.
Claudia Lapping, “Re-Reading Riviere’s ‘Womanliness as a Masquerade’: Putting Sex and the (trans) Body Back into Question,” in The Palgrave Handbook of Psychosocial Studies (2022), UCL Discovery·저자 승인 원고, DOI. 공개 초록에 요약한 사회·몸·트랜스의 세 층위를 근거로 함. 확인: 2026-09-29. ↩ ↩2
- 15.
British Psychoanalytical Society, “Joan Riviere”, 전기·주요 논문 서지. 확인: 2026-09-29. ↩ ↩2 ↩3 ↩4 ↩5
- 16.
Nina Bakman, “She Can Be Put to Work: Joan Riviere as Translator between Freud and Jones,” Psychoanalysis and History (2008), 초록·서지. 본문 유료; 이 글의 사실 언급은 공개 초록 범위에 한정. 확인: 2026-09-29. ↩
- 17.
Riviere, “A Contribution to the Analysis of the Negative Therapeutic Reaction,”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 17 (1936), 304–320; 영국 정신분석학회 소개. 논문의 분석가 측 반응에 관한 해석은 제한된 열람용 사본 304–305쪽 등과 대조. 사본의 PEP 이용 조건상 재배포하지 않음. ↩ ↩2 ↩3
- 18.
Jacques Lacan, “La signification du phallus” (1958), Écrits; 프랑스어 원문 재게시. 버틀러 『젠더 트러블』 제2장 ‘Lacan, Riviere, and the Strategies of Masquerade’ 59–61쪽도 교차 확인. 이 글의 연결은 이론적 독해이며 리비에르의 직접 제자라는 뜻이 아니다. ↩
- 19.
Mary Ann Doane, “Film and the Masquerade: Theorising the Female Spectator,” Screen 23, nos. 3–4 (1982), 74–87, DOI/출판사; 저작권자 허가 여부 미확인 참고용 사본 78–81쪽 대조. 사본 파일은 배포하지 않음. ↩
- 20.
Judith Butler, “Performative Acts and Gender Constitution,” Theatre Journal 40, no. 4 (1988), 519–531, 교육용 PDF, 특히 519–520·531쪽. 반복과 제재에 관한 논의는 1990년 『젠더 트러블』의 리비에르 독해와 관련되지만 같은 텍스트는 아님. ↩
- 21.
Jean Walton, “Re-Placing Race in (White) Psychoanalytic Discourse: Founding Narratives of Feminism,” Critical Inquiry 21, no. 4 (1995), 775–804, URI 대학 연구 저장소·DOI. 대학 페이지의 서지·PDF 표제, 리비에르 원논문 306쪽의 인종화된 장면, 래핑의 원고에서 소개한 월턴의 문제제기를 대조. 월턴 논문의 세부 논증 전체는 독립적으로 검증하지 않았음. 대학 페이지는 원문 이용 조건을 ‘All rights reserved’로 표시. 확인: 2026-09-29. ↩ ↩2
- 22.
Nietzsche, Human, All-Too-Human I, §405 “Masks,” 영문판 해당 책. 대상은 ‘어떤 여성들’이며, 남성이 그들의 영혼을 끝없이 찾는다는 결말까지 포함해 읽음. 확인: 2026-09-29. ↩
- 23.
Nietzsche, Beyond Good and Evil §§40, 289, 영문 공개판. §40은 깊이와 은폐, §289는 동굴 뒤 동굴과 ‘모든 말이 가면’이라는 발상을 전개한다. 확인: 2026-09-29. ↩
- 24.
Athol Hughes, “Joan Riviere and the Masquerade,” Psychoanalysis and History 6, no. 2 (2004), 161–175, 공개 초록. 일기·가족 인터뷰를 근거로 자기 경험의 반영을 주장하나, 논문 전문은 유료이고 여기서는 초록 범위만 확인. 확인: 2026-09-29. ↩
- 25.
Friedrich Nietzsche,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I, §405; Jenseits von Gut und Böse §§40, 289. 확인한 공개 영문판은 Helen Zimmern 번역의 Human, All-Too-Human과 Beyond Good and Evil. 이 글의 한국어 문장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논점 의역. 확인: 2026-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