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단순화하지 말자는 말이, 행위를 판단하지 말자는 요구로 바뀌는 순간.
악의 평범성은 악인에게도 좋은 면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더 불편한 질문은, 그 오용이 단지 틀린 정의를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누구의 책임을 지우는 데 사용되는가이다.
개념과 맥락 — 연작의 입구 · 첫 번째 글
이 글의 목차
다면적인 인간, 지워지는 행위
어떤 사람의 폭력적 행동이 드러났을 때, 그 장면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인간을 한 사건으로 소진시키지 말자는 신중함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악의 평범성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인간에게 다른 면도 있다는 말이 한나 아렌트의 개념을 빌려 갑자기 철학적 깊이를 얻는다.
그때 해야 할 일은 철학자의 이름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문장 사이의 빈칸을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아직 모르는 면이 있다는 사실과, 이미 확인된 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결론은 다르다. 전자는 인물 전체에 관한 정보의 한계이고 후자는 행위에 관한 판단의 문제다. 인물의 전모를 알아야만 특정 행위를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는 대부분의 책임을 영원히 묻지 못한다. 인간은 언제나 더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출발점은 실제 사건의 판결이 아니라 이러한 발언 구조다. 구체적인 사건의 사실관계나 발화자의 전체 맥락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특정인의 혐의와 속마음을 확정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다면성이라는 말이 무엇을 덧붙이는가. 행위를 더 정확히 보게 하는가, 아니면 행위에서 시선을 돌리게 하는가.
예를 들어 누군가 다른 사람을 모욕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도, 그에게 좋은 친구였던 시절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친구였다는 사실은 그 모욕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다. 장점과 해악을 장부의 양쪽에 적어 상계하면 인간을 입체적으로 이해한 것이 되는가. 오히려 그 사람의 입체성은 보존하면서, 그가 한 행위의 구체성은 없애버릴 수도 있다.
아렌트의 평범성은 악을 작게 만들지 않는다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말한 직접적인 배경은 1961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과 나치의 유대인 절멸 범죄다. 범죄의 규모는 엄청났는데, 자신이 관찰한 행위자의 말과 사고에서 그 규모에 어울리는 악마적 깊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불일치가 문제였다. 이것은 아렌트의 역사적 인물 해석이며, 재판정에서 보인 모습이 실제 인물의 모든 이념과 의도를 투명하게 보여준다는 뜻은 아니다.1

1971년 「사유와 도덕적 고려」에서 아렌트는 자신이 처음부터 하나의 완성된 이론이나 교리를 제시한 것이 아니었다고 되짚는다. 423쪽에서는 이렇게 쓴다. 아래 한국어는 작업 번역이다.
“사유하지 못함은 어리석음이 아니다. 매우 지적인 사람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
“Inability to think is not stupidity; it can be found in highly intelligent people”2
잘 계산하는 사람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되묻는 사람은 같지 않다. 조직에서 업무를 영리하게 수행하고, 승진의 기회를 알아보고, 명령의 빈틈을 효율적으로 메우면서도 그 일이 타인에게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무사유를 지능 부족이나 수동적 복종의 동의어로 만들면, 바로 이 불편한 양립이 사라진다.
평범성은 악이 별일 아니라는 뜻도, 범죄자가 사실은 착하다는 뜻도 아니다. 악마가 아니었다는 말에서 책임이 없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악마라는 설명이 우리에게 너무 편리할 수 있다. 악을 특별한 종족의 속성으로 돌리면, 내 일상적 성실함과 순응은 자동으로 안전해진다. 괴물을 비난하는 동안 나는 인간이라는 인증을 받는다.
아렌트의 문제는 그 인증을 불편하게 한다. 평범한 얼굴이 악을 지워주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의 언어 속에서 엄청난 해악이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에게는 누구나 좋은 면도 있다는 교훈으로 바꾸면, 위협을 드러내던 개념이 우리를 위로하는 교양 문장으로 바뀐다.
구조를 설명하는 일과 책임을 없애는 일
원래의 역사적 맥락이 국가적·관료적 범죄였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러나 규모가 크면 악의 평범성이고 작으면 아니라는 분류표는 없다. 범죄의 크기와 행위자의 사유·참여 방식은 서로 다른 축이다. 시스템의 문제라는 설명도 개인은 책임이 없다는 결론과 동일하지 않다.
「독재 아래에서의 개인적 책임」에서 아렌트는 체계의 작동을 설명하는 관점과 한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관점을 구별한다. 정치 체계에서는 사람이 교체 가능한 기능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책임을 묻는 자리에는 누가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구조는 그 질문의 조건이지 질문을 없애는 지우개가 아니다.3

아렌트는 글 말미에서 왜 복종했는가라는 질문을 왜 지지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정치적·도덕적 사안에서 성인의 참여를 단순한 복종으로만 표현하면, 그 참여가 공동의 사업을 실제로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 가려질 수 있다는 논지다.4
이 질문을 억압 아래 있던 모든 사람의 자유와 책임이 같았다는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강제와 선택의 조건을 구별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으로 행위의 평가까지 끝났다고 여기는 태도는 흔들린다. 나는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은 내가 그 조직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개념 오용의 역전이 선명해진다. 악의 평범성은 시스템 속의 개인에게 불편한 질문을 되돌려준다. 그런데 오용된 악의 평범성은 인간은 복잡하고 시스템도 복잡하다는 이유로 질문을 잠시, 그리고 자주 무기한, 유예한다. 책임을 묻기 위해 가져온 개념으로 책임을 멈춘다. 철학은 면죄부를 발급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 철학자의 도장을 먼저 찍는다.
에포케는 윤리적 휴업이 아니다
이 혼란은 판단 중지라는 번역어에서도 반복된다. 아렌트의 무사유를 설명하며 판단 중지라는 말을 쓰면, 후설의 에포케와 같은 뜻인지 되묻게 된다. 단어가 같다고 작동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후설은 『이념들 I』 §32에서 자연적 태도에 속한 세계의 일반적 정립을 작동에서 제외한다고 설명한다. 세계를 부정하거나 세계의 존재를 의심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명시한다. 당연하게 받아들인 세계 정립의 효력을 괄호 치고, 경험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탐구하기 위한 방법이다.5

따라서 에포케와 무사유를 같은 것으로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고 둘을 엄밀한 논리적 반대말로 만들 필요도 없다. 서로 다른 문제·대상·방법에 속한 개념이다. 더욱이 아렌트 자신도 사유와 개별 사태를 판단하는 능력이 동일하지 않다고 구별한다.6
이 정정은 사전의 꼼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판단을 유보하는 행위는 더 정확한 판단을 위한 준비가 될 수도 있고, 책임을 묻는 순간을 피하기 위한 습관이 될 수도 있다. 실제 기능을 보지 않으면 같은 고상한 말이 서로 반대의 일을 한다. 잠시 멈춤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 누구의 현실이 계속되는지도 물어야 한다.
온라인 군중을 아렌트의 이름으로 부를 때
온라인에서 모두가 욕하기 때문에 자신도 욕하는 장면은 아렌트의 문제의식과 비교할 만하다. 그러나 집단에서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악의 평범성이라고 선언하면, 정의를 고친 우리가 다시 개념의 범위를 지워버린다.
유비가 생산적이려면 참여 방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정보를 확인하지 않고 상투적인 표현을 복제하는가. 공격받는 사람을 하나의 딱지로 환원하는가. 자신의 댓글을 작은 몫으로 쪼개 책임을 없애는가. 반례를 만나도 집단의 흐름을 이유로 생각을 수정하지 않는가. 반대로 계획적 협박, 계산된 선동, 원한과 이익이 주요 동력이라면 그것을 별도로 설명해야 한다. 이 질문들은 오늘의 적용을 위한 필자의 제안이지 아렌트가 인터넷에 관해 직접 제시한 조건이 아니다.
더 나아가 무사유라는 말을 단순한 무지와 동일시하면, 너무 많은 것을 놓친다. 혐오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료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 그래도 장난이라는 거리, 모두가 한다는 안심, 표적을 함께 조롱하는 즐거움 때문에 계속할 수 있다. 지젝의 냉소적 이데올로기 분석을 빌리면, 아는 것과 실천에서 믿는 것은 어긋날 수 있다. 이것은 아렌트의 무사유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그 설명을 검토하게 하는 별도의 렌즈다.7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왜 몰랐는가만이 아니다. 알면서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보상은 무엇인가. 나는 진지하게 믿지 않는다는 말이 행위에서 빠져나왔다는 증거가 되는가. 조롱의 쾌감은 진지한 신념이 없어도 작동한다. 냉소적 거리가 참여의 반대가 아니라 참여를 가볍게 지속시키는 장치일 수 있다.
이를 실제 이용자 개개인의 심리 진단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어를 정확히 고르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해진다. 사유의 부재, 알고도 행하는 냉소, 집단의 보상, 적극적인 악의는 어떤 경우에는 겹치고 어떤 경우에는 갈라진다. 개념은 이 차이를 보게 해야지 모든 행위자를 한 종류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렌트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아이히만을 지우지 않는다
개념의 오용을 비판하는 글에는 반대편의 위험이 있다. 철학적 통찰이 중요하므로 아렌트의 아이히만 해석에 대한 역사적 비판은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다. 그렇게 되면 한 사람의 관찰에 기초한 개념을 지키기 위해 그 사람의 실제 자료를 밀어내게 된다.
베티나 슈탕네트의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은 재판 이전의 자료와 망명 나치 네트워크, 행위자의 자기 연출을 통해 재판정의 인상을 재평가한다. 여기서는 출판사 소개와 서지를 확인했으며 책 전체나 사센 자료를 전수 대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연구 하나로 모든 논쟁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는다.8

아렌트의 1963년 기사도 아이히만을 단지 아무 의지 없는 기계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가 생각한 이상주의자의 모습과 적극적 자기 정당화가 등장한다. 1971년 논문의 이념적 확신에 관한 판단과 후대 자료 사이의 긴장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9
따라서 역사적 인물 해석의 정확성, 개념을 다른 사례에 적용할 범위, 사유와 책임에 관한 철학적 질문의 가치를 나누어 검토해야 한다. 철학은 실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면책도, 한 역사적 판단의 한계 때문에 모든 질문을 폐기하는 단죄도 충분하지 않다. 존중의 가장 게으른 형태는 반론으로부터 철학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보다 어려운 존중은 그가 던진 질문을 그의 이름에도 돌려주는 일이다.
정확한 개념을 가진 나라는 마지막 면죄부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을 보자. 악의 평범성을 정확히 설명하는 사람은 남의 무사유를 판정하는 쾌감을 얻기 쉽다. 나는 아렌트를 제대로 읽었다는 만족이 나의 참여 방식을 다시 묻는 일을 대신할 수 있다. 잘못된 정의를 교정하는 댓글 하나로 나는 책임 있는 사람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개념의 정확성은 사용자의 윤리성을 자동으로 보증하지 않는다. 정확한 용어로도 피해자의 말을 무시할 수 있고, 원전 각주를 달고도 논쟁의 승리를 더 즐길 수 있다. 개념 오용을 비판하는 교양이, 오용된 개념과 똑같이 자기 면죄의 장치가 될 수 있다. 이 문장은 아렌트의 직접 진술이 아니라 이 글이 자신에게 되돌리는 비판이다.
그러므로 다음번 다면성의 말을 들었을 때, 사람을 단순화하지 말자는 요청을 곧바로 거절할 필요는 없다. 대신 구별하자. 인물 전체에 관해 유보하는 것은 무엇이고, 행위에 관해 이미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유보가 누구에게 시간을 주고 누구의 시간을 빼앗는가.
인간은 한 가지 모습만 가진 존재가 아니다. 맞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도 한 가지 표정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어 읽기
- 철학은 어떻게 광고 카피가 되는가 — 인용이 사유의 입구가 아니라 깊이의 인증서로 사용될 때.
- 침묵은 소통 불가능의 증거인가 — 완전한 이해의 불가능성이 실제 이해를 무효화하는 방식.
- 한나 아렌트, 에드문트 후설, 베티나 슈탕네트 — 인물별 개념과 읽을 위치.
출처와 참고 URL
확인일: 2026-10-02. 아래의 구체적 현대 적용과 권위·향유 분석은 필자의 해석이다. 원전의 철학자들이 특정 온라인 사건을 판정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 Hannah Arendt, “Thinking and Moral Considerations: A Lecture,” Social Research 38(3), Autumn 1971, pp. 417–446. 417쪽의 최초 문제 설정, 419쪽의 개념 사용 정당화, 423쪽의 지능과 사유, 445–446쪽의 사유·판단 관계를 대조했다. 원문 PDF, JSTOR 서지.
- Hannah Arendt, “Personal Responsibility Under Dictatorship,” 1964. The Montréal Review, June 2023 재수록. 2023년은 원저 집필연도가 아니다. 재수록 본문. 인쇄판 페이지 번호를 별도로 대조하지 않아 문단 위치로 인용한다.
-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I,” The New Yorker, 1963-02-16. 저자 기사.
- Edmund Husserl, Ideen I (1913), §32, Hua III/1 pp. 65–66. UNAM 독일어·스페인어 대조 전사, SEP 개관.
- Bettina Stangneth, Eichmann Before Jerusalem: The Unexamined Life of a Mass Murderer, translated by Ruth Martin, English edition 2014. 출판사 소개·서지. 소개는 확인했지만 책 전체를 검증한 것은 아니다. 소개문에 재판을 1960년으로 적은 부분은 채택하지 않았다.
- SEP: Hannah Arendt, IEP: Slavoj Žižek, 특히 Ideological Cynicism and Belief와 Jouissance as Political Factor.
- 이미지의 저작자·권리·원자료 페이지는 각 도판의 캡션에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