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지금 이해할 수 있는 것까지 포기할 때.
누군가의 모든 내면을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무엇을 요청하고 무엇을 정정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침묵의 명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우리가 대화에 요구한 완전함의 정체다.
개념과 맥락 — 연작의 입구 · 세 번째 글
이 글의 목차
소통의 실패를 설명하는, 아주 성공적인 문장
서로 완전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다. 같은 단어를 들어도 떠올리는 경험은 다르고, 말로 전하지 못한 감정은 남는다. 여기에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침묵 명제가 붙는다. 언어는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고, 추상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되며, 그러므로 의사를 언어에 담아 전달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먼저 범위를 정하자. 특정 영상의 전체 발언과 타임코드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발화자의 사상 전체를 판정하지 않는다. 이 글은 전달된 논증의 연결을 검토한다. 그 연결만 놓고 보면, 실제 문장을 인용했어도 정확한 철학적 근거를 제시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우선 이상한 점이 있다. 소통의 불가능성을 설명하는 사람은 그 설명만큼은 전달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곧 자기모순의 결정적 논박은 아니다. 불완전한 소통은 충분히 가능하고 전달의 한계를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통이 완전하지 않다는 말과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후자는 그 설명을 듣고 이해했다는 사건까지 무엇으로 취급할지 답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불가능성의 선언이 주는 안도다. 관계에서 내가 잘 설명하지 않았는가를 묻는 일은 피곤하다. 상대의 정정을 다시 듣는 일은 더 피곤하다. 그런데 언어 자체의 운명 때문에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 피곤한 책임은 장엄한 비극으로 올라간다. 사소한 부주의가 철학적 한계라는 옷을 입는다.
『논리철학논고』의 끝을, 시작과 함께 읽기
실제 문장은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명제 7이다. 아래 한국어는 작업 번역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1

이 문장은 서문의 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한 주장, 사실을 그리는 명제의 분석, 논리와 가치의 한계, 6.54의 사다리 비유를 거쳐 나온다. 마지막 한 줄을 개인 간 감정 전달의 실패에 바로 붙이면 책이 묻던 문제가 바뀐다.
더 직접적인 문장은 4.026에 있다.
“그러나 명제들을 통해 우리는 서로 뜻을 전달한다.”
“Mit den Sätzen aber verständigen wir uns.”2
단어의 의미를 설명받는 것과 명제를 통해 서로 이해하는 일이 이 대목에서 함께 논의된다. 이것이 현실의 모든 소통은 언제나 성공한다는 경험적 보증은 아니다. 다만 책 전체를 언어로 의사를 전달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만들 수 없게 한다.
『논고』의 대표적인 독해에서 말할 수 없음은 사실을 서술하는 명제의 한계, 논리적 형식, 윤리와 세계의 의미에 관한 문제와 연결된다. 6.41–6.421은 세계의 의미와 가치를 세계 안의 사실과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지 묻는다.3
친구의 서운함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말과, 세계의 모든 사실을 기술해도 그것만으로 세계의 궁극적 가치를 기술한 것은 아니라는 말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전자는 특정 경험을 어느 정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후자는 어떤 종류의 표현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또한 말할 수 없지만 보여지는 진리를 인정하는 독해와, 그런 진리를 말하려는 철학적 유혹을 해소하는 이른바 단호한 독해 사이에 논쟁이 있다. 한 해석을 유일한 정설로 만들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그 논쟁은 사람들이 대화할 때 항상 실제로 오해한다는 경험적 결론과 같지 않다.4
세계를 그리는 언어 — 전기의 질문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중심 질문은 명제가 세계를 의미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조건이다. 여기서 그림은 문장이 사물과 눈으로 보아 닮았다는 뜻이 아니다. 문장의 요소와 가능한 사태의 요소가 어떤 구조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5
설명을 위한 가상 예를 들자. 책 A가 책 B의 왼쪽에 있다는 문장은 종이 위에서 실제 책과 닮지 않았다. 그래도 어떤 배치라면 참이고 어떤 배치라면 거짓인지 이해할 수 있다. 문장은 가능한 관계를 나타낸다. 이것은 해설용 비유이며 비트겐슈타인이 책을 궁극적 단순 대상의 사례로 제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모델에서는 거짓 명제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A가 오른쪽에 있어도 왼쪽에 있다는 문장이 어떤 사태를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거짓인 것과 뜻이 없는 것은 다르다. 모든 발언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든 발언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바꾸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서도 보인다.5
전기를 인공적인 이상언어의 철학, 후기를 일상언어의 철학이라고만 나누는 설명도 조심해야 한다. 『논고』 5.5563은 일상언어의 명제들이 있는 그대로 논리적으로 정돈되어 있다고 말하고, 3.326은 기호에서 상징을 알아보려면 의미 있는 사용을 살펴야 한다고 한다. 전기에 사용과 일상언어가 완전히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6
삶 속에서 쓰이는 언어 — 후기의 전환
후기에는 모든 언어활동을 하나의 논리적 그림으로 설명하려는 요구가 의심받는다. 말은 기술할 뿐 아니라 명령하고, 묻고, 농담하고, 약속하고, 감사하고, 기도한다. 『철학적 탐구』 §11의 도구상자와 §23의 언어활동 목록은 단어들의 비슷한 외양에 속지 않도록 한다.7

문이 열려 있음을 말하는 가상의 발언을 생각해보자. 점검 중에는 상태 보고일 수 있고, 추운 방에서는 문을 닫아달라는 요청일 수 있으며, 반복해서 문을 열어놓은 사람에게는 항의일 수 있다. 단어의 사전적 뜻만 아는 것으로는 그 발언이 하는 일을 전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부족함이 뜻을 알아낼 수 없다는 증거는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한 말인지 살피면 된다.
언어게임은 제멋대로 말장난한다는 뜻도 아니다. 건축 현장에서 특정 돌을 요구하는 외침과 그에 응답하는 행동은 훈련, 규칙, 교정과 얽혀 있다. 잘못 가져온 돌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 사용이 있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이 활동에서 차이를 만드는지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8
전기와 후기의 열두 갈래
| 비교 | 『논리철학논고』 중심의 전기 | 『철학적 탐구』 중심의 후기 |
|---|---|---|
| 대표 저작 | 독일어 발표 1921, 영문 대역본 1922 | 1953년 사후 출간 |
| 중심 질문 | 명제가 세계를 표현하는 조건 | 표현이 생활 속에서 하는 일 |
| 대표 모델 | 논리적 그림 | 언어게임과 도구의 다양성 |
| 의미의 초점 | 이름·대상, 명제·가능한 사태의 관계 | 사용·학습·교정·규칙의 자리 |
| 통일성의 요구 | 의미 있는 명제의 일반적 구조 | 한 형식으로 모든 사용을 설명하려는 요구의 비판 |
| 주된 기능 | 사실을 기술하는 명제의 분석 | 기술·질문·명령·약속 등 다양한 활동 |
| 개념의 경계 | 논리적 분석과 경계의 명료화 | 반드시 하나의 날카로운 정의가 있어야 하는지 검토 |
| 혼란의 양상 | 언어의 논리와 표현 한계의 오해 | 한 사용의 그림을 다른 모든 사용에 강요함 |
| 방법 | 논리적 명료화 | 실제 용법의 비교와 여러 치료 |
| 말할 수 없음 | 논리적 형식·가치·세계의 의미와 얽힘 | 만능 침묵 명제보다 개별 표현의 기능 조사 |
| 소통 | 명제를 통해 서로 뜻을 전달함 | 이해의 공동 실천과 기준을 조사함 |
| 글의 형식 | 번호로 배열된 압축적 명제 | 사례·반문·되돌아가기와 관점 변화 |
이 표는 입구이지 두 철학의 전부가 아니다. 전기와 후기를 객관적 의미에서 주관적 의미로의 추락, 소통 가능에서 불가능으로의 이동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또한 둘 다 철학을 사실 지식의 축적만이 아니라 혼란을 명료하게 하는 활동으로 이해한다는 연속성이 있다.9
전환은 출간연도 사이의 빈칸에서 일어난다
1889년에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이후 철학 연구의 전면에서 물러나 교사 등으로 일했다.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뒤 옛 생각을 재검토했고, 1930–1940년대의 탐구를 거쳐 1951년 사망했다. 1953년 『탐구』 출간을 후기 철학의 시작으로 보면 그 긴 전환을 지우게 된다.10

『탐구』 서문에서 그는 옛 생각의 심각한 오류를 인정하면서도 새 생각을 옛 생각과 대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새 책을 여러 방향에서 풍경을 지나며 얻은 스케치들의 앨범에 비유한다. 전기와 후기는 다른 사람이 쓴 무관한 두 책도, 포장을 바꾼 같은 책도 아니다.11

의미는 사용이다 — 이 명언에도 조건이 있다
『탐구』 §43의 유명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한국어는 작업 번역이다.
“단어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 사용이다.”
“Die Bedeutung eines Wortes ist sein Gebrauch in der Sprache.”12
그러나 원문에는 의미라는 말을 사용하는 큰 부류의 경우에 해당하지만 모든 경우는 아니라는 단서가 있다. 그것을 떼어 모든 의미는 마음대로 바뀐다는 공식으로 만들면, 광고 카피를 비판하기 위해 또 다른 광고 카피를 쓰게 된다.
한 단어가 불러오는 개인적 연상과 그 단어로 전달하는 내용도 같지 않다. 약속이라는 말에서 한 사람은 배신을 떠올리고 다른 사람은 신뢰를 떠올릴 수 있다. 그래도 내일 오후 세 시까지 원고를 보내기로 했다는 약속의 내용에는 동의할 수 있다. 감정의 동일성을 요구하지 않고도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의미의 조건이 상황에 있다는 말은 상황을 확인해도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모호성이 있다는 사실은 대화가 필요하다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으로만 쓰는 것은 이상한 선택이다. 문맥의 중요성을 내세우며 문맥을 더 묻는 일을 그만두는 셈이다.
가족 유사성과 사적 언어 — 다양성은 고립이 아니다
『탐구』 §§65–67은 게임들의 겹치고 교차하는 닮음을 살핀다. 하나의 공통 본질을 찾지 못했다고 게임이라는 말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가족 유사성은 개념의 경계를 언제나 수학 공식처럼 닫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어떤 개념을 어떤 사례에나 붙여도 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13
사적 언어 논의도 모두가 자기 의미에 갇혀 있다는 설명의 근거가 아니다. 남에게 공개하지 않은 암호나 혼잣말이 표적인 것이 아니다. 의미와 올바름의 기준을 오직 한 사람만 접근할 수 있는 내적 경험에 고정하려는 구상이 문제다. §258은 나에게 맞게 보인다는 것과 실제로 맞게 사용했다는 구별을 그런 방식으로 유지할 수 있는지 묻는다.14
그렇다고 고통과 내면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의 존재와 경험을 가리키는 표현의 의미·기준은 다른 문제다. 규칙 따르기와 사적 언어 논증의 범위에는 연구상의 이견도 있다. 공동의 기준이 있다는 말 역시 모두가 같은 정치적 의견이나 같은 느낌을 가져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다.14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전부 소유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타인의 말을 아예 이해할 수 없다는 근거는 아니다. 오히려 그 고립의 그림을 먼저 놓고 언어를 설명해야 하는지부터 다시 물을 수 있다. 모든 대화가 마음속 물건을 포장해 상대의 마음에 배송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배송 중에 조금이라도 손실이 생겼으니 실패라는 결론이 쉽게 나온다. 후기의 질문은 애초에 왜 모든 말을 그렇게 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완전한 이해라는 요구는 누가 세웠는가
완전한 의사소통이라는 표현에는 적어도 세 기준이 섞인다.
| 요구한 완전함 | 구별해야 할 것 |
|---|---|
| 상대의 모든 기억·감정·연상을 내 안에 재현 | 내면 전체의 공유와 특정 발언의 이해는 다르다 |
| 이번 주장·요청·정정의 정확한 이해 | 내면 전체를 공유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수 있다 |
| 어느 상황에서도 오해 가능성이 없음 | 보장의 부재와 실제로 언제나 실패함은 다르다 |
설명을 위한 가상의 상황을 보자. 친구는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에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 데 서운했다고 정정한다. 듣는 사람이 선물 자체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아들었다면 한 가지 오해는 풀렸다. 친구의 서운함을 같은 강도로 느끼지 못해도, 그 정정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철학적 반전은 완벽한 소통을 낙관하는 데 있지 않다. 실패를 선언하기 전에 성공의 조건을 누가 너무 높게 설정했는지 보는 데 있다. 상대의 전체 내면을 소유하는 일만 이해라고 부르면, 타인은 필연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그런 완전한 이해는 타인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이상인가, 타인을 나에게 남김없이 투명하게 만들려는 요구인가.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직접 제시한 관계론이 아니라 이 글의 비판적 확장이다. 타자를 존중한다며 완벽히 알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 이전에 모든 것을 알아야만 이해라고 부르겠다는 환상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불가능성의 선언이 그 환상을 버린 모습이 아니라 끝까지 유지한 결과일 수 있다.
『탐구』 §87은 설명이 제 역할을 하려면 상상 가능한 모든 오해를 제거해야 하는지 묻는다. 필요한 설명은 실제로 생길 오해를 막거나 해소한다. 이정표는 정상적인 조건에서 목적을 수행하면 제 역할을 한다. 의심을 무한히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번 길을 잃었다는 증거는 아니다.15
오리와 토끼가 서로의 감옥인가

같은 선이 오리로 보였다가 토끼로 보인다. 후기의 측면 보기와 관련된 대표적 도상이다. 관련 논의는 구판 『탐구』 제2부 XI에 있었고 새 편집에서는 『심리철학—단편』으로 분리되기도 한다.16
이 그림을 사람마다 다르게 보므로 모든 해석은 자의적이라는 증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부리였던 선이 귀가 되는 지점을 가리킬 수 있고 다른 보기를 배울 수 있다. 다른 시각의 존재는 서로 대화할 수 없다는 증거이기 전에, 대화에서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의 사례다.
물론 모든 관점의 차이가 오리–토끼처럼 쉽게 풀린다는 뜻도 아니다. 공포, 권력, 상처 때문에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관계가 있다. 다만 그런 차이는 누구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일반론으로 덮을 일이 아니다. 누구의 말이 반복해서 무시되는지, 누가 설명할 기회를 갖는지, 어떤 실패를 언어의 본성이라고 부르고 넘어가는지 더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침묵의 품위는 서로에게 대칭적으로 배분되지 않을 수 있다.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더 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다. 아직 말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그 선언은 설명의 책임을 거부하는 권위가 된다. 침묵은 언제나 겸손한가. 때로는 마지막 말보다 강한 마지막 행동일 수 있다.
철학의 치료도 새로운 침묵 명령이 될 수 있다
『탐구』 §§109–133의 철학은 모든 문제에 하나의 이론을 적용하기보다 실제 용법을 여러 방향에서 배열하고 혼란을 풀어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116은 말을 형이상학적 사용에서 일상적 사용으로 되돌린다고 말한다. 전문용어와 추상적 사유를 전부 금지하는 명령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17
그런데 여기에도 권위의 위험이 있다. 어떤 문제든 언어의 오해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면, 사회적 갈등과 실제 상처까지 문법 교정으로 처리하게 된다. 치료하는 철학자는 누가 혼란스러운지를 판정하는 사람의 자리를 얻는다. 이 경계는 후기 철학을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에도 구체성을 요구하자는 것이다.
아렌트는 「사유와 도덕적 고려」 419쪽 각주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침묵 명제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감각의 경험조차 말로 그대로 기술할 수 없다는 논점이다. 이것은 아렌트의 독해이지 『논고』의 의미를 최종 확정하는 자료가 아니다. 두 철학자가 언어 때문에 생기는 혼란에 관심을 가졌다고 모든 결론을 공유한 것은 아니다.18
철학자들 사이의 이견은 유용하다. 그들은 우리가 이름 몇 개를 이어 하나의 멋진 결론을 만들도록 기다리는 권위의 창고가 아니다. 개념을 정확히 쓰려는 노력도 철학자에게 최종 판정권을 맡기는 일과는 달라야 한다.
침묵을 비유로 빌리는 일과 근거로 제시하는 일
영화 속 인물들의 소통 한계를 읽다가 비트겐슈타인의 침묵이라는 표현을 떠올릴 수 있다. 그때 그것은 비평자의 연상과 변형이다. 어떤 연결을 했는지 보여주면 된다. 원래 문맥 밖의 차용을 전부 금지하면 비평도 빈약해진다.
반대로 비트겐슈타인이 소통 불가능을 증명했으므로 이 영화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원전과 논증의 근거가 필요하다. 같은 문장이라도 역할이 다르다. 비유는 관점을 열 수 있지만, 입증된 결론인 척하면서 앞선 주장의 빈칸을 메워서는 안 된다.
이 차이를 지킨 뒤에도 잔여는 남는다. 상대가 설명해주었다고 그를 다 안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의 설명을 듣지 않은 것과 듣고 이해한 것의 차이를 지울 수도 없다. 타인을 남김없이 소유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이해의 포기가 아니라, 이해한 것을 계속 수정할 수 있도록 남겨두는 태도일 수 있다.
철학자의 마지막 문장으로 대화를 끝내기 전에, 상대가 방금 정정한 문장으로 돌아가자. 그 정정에서 바뀐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은 덜 장엄하다. 그래서 더 어렵다. 우주적 불가능성 대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어 읽기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생애·저작·원전 읽기 순서와 추가 사진.
- 철학은 어떻게 광고 카피가 되는가 · 악의 평범성은 면죄부가 아니다
- 『논고』 2.1–2.225, 4.026, 4.112–4.1212, 5.5563, 6.41–7.
- 『탐구』 §§1–23, 43, 65–67, 87, 109–133, 198–202, 241–258.
출처와 참고 URL
확인일: 2026-10-02. 관계의 환상·권위·침묵의 비대칭성에 관한 현대적 논지는 필자의 해석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특정한 심리나 특정 영상의 의도로 제시하지 않는다.
-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독일어 발표 1921, 영문 대역본 1922. Kevin C. Klement 독일어·영어 대조판. 명제 번호로 인용한다. 한국어 인용은 이 글의 작업 번역이다.
- Wittgenstein,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1953 사후 출간. Wittgenstein Project 독일어 본문. §43의 단서, §87·§88, §116·§117, §258 등을 본문으로 대조했다. 영어판 참고 PDF.
- SEP: Ludwig Wittgenstein: 생애, 전환기, 전기·후기의 차이와 연속성, 『논고』의 해석 논쟁.
- SEP: Wittgenstein’s Logical Atomism: 논리적 그림·대상·명제 구조. 본문의 책 배치 예시는 원저자의 직접 사례가 아니다.
- SEP: Private Language: 사적 언어의 표적과 규칙·기준의 해석 논쟁.
- Hannah Arendt, “Thinking and Moral Considerations: A Lecture,” Social Research 38(3), 1971, p. 419 n. 3. 원문. 아렌트의 비판적 독해와 『논고』 자체의 해석은 구별했다.
- 오리–토끼는 1892-10-23의 Fliegende Blätter 자료다. 현대 생활 공간 사진은 촬영연도와 저작자를 캡션에서 구별한다. 이미지 출처·권리는 해당 도판의 캡션을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