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몰라서만 복종하지 않는다. 때로는 안다는 이유로 더 편안하게 복종한다.

모든 것이 연출이라는 말을 들은 뒤 세상이 덜 불편해졌다면, 잠깐 의심할 필요가 있다. 비판이 나를 깨운 것이 아니라, 더는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한 잠자리를 마련해준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목차

이 글에서 지젝적이라는 말의 범위

아래 논증은 지젝이 디즈니랜드·이 심슨 에피소드·《괴물》·진중권의 칼럼을 직접 묶어 논평한 글을 번역한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에서 출발한 냉소·믿음·환상·향유 논의를 학술 해설과 대조한 뒤, 이번 자료에 적용한 독립적인 비평이다. 정확한 직접 발언과 관점 차용을 구분한다.1

보드리야르를 가짜의 철학자, 지젝을 진짜의 복원자로 나누지도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순진한 현실주의와 단순한 거짓의 폭로를 의심하지만, 그 의심을 움직이는 이론은 다르다. 보드리야르의 코드·모형·시뮬라시옹과 지젝의 상징적 질서·환상·주체의 균열을 같은 용어로 덮어서는 안 된다.

첫 반전 - 더 많은 정보가 왜 충분하지 않은가

이데올로기를 사실을 모르는 상태로만 이해하면 해결책은 폭로다. 숨겨진 사실을 알리면 사람들은 올바르게 행동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지젝의 냉소 논의는 그 낙관을 멈춰 세운다. 현대의 주체는 권위의 위선과 제도의 이해관계를 상당히 알고도 그 실천을 계속할 수 있다. 믿음은 머릿속의 진지한 동의에만 있지 않고 행위와 관습에도 놓인다.2

진중권의 2003년 칼럼에서 기존 정당의 부패를 알면서 계속 그 구도 안에 투표한다는 대목은 이 구조와 연결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연결이 특정한 투표를 한 사람의 무의식을 진단해주는 것은 아니다. 선택에 대한 현실적 제약과 정책 차이, 전략적 판단도 있다. 알면서 한다는 문장은 모든 합리적 타협을 무력한 복종으로 만드는 도장이 아니다.

더 날카로운 질문은 나는 속지 않는다는 거리감이 어떤 실천을 편하게 해주는가다. 광고가 나를 조종한다는 말을 농담으로 소비하면서도 광고가 정한 인정의 기준을 따를 수 있다. 체제를 조롱하는 일은 체제에 대한 불복종과 자동으로 같지 않다. 때로 조롱이 순응의 불쾌감을 덜어주는 윤활유다.

연출임을 안다는 거리감과 같은 실천의 지속, 비평가의 자기 점검을 이어 그린 도식
지식과 믿음의 실천적 위치는 다를 수 있다. 지젝의 개념을 적용한 자체 설명도이며, 개인의 동기를 판정하는 심리검사가 아니다.

둘째 반전 - 환상은 현실의 반대편에만 있지 않다

환상을 현실 위에 덧씌운 거짓 장식이라고 생각하면, 장식을 걷어낸 뒤 현실이 그대로 남을 것 같다. 지젝에게 환상은 무엇을 욕망하고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느낄지를 조직하는 틀이다. 현실의 경험이 성립하도록 지지하는 것이기도 하다.3

디즈니랜드의 경우 환상은 성과 캐릭터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출구 밖에는 이제 진지하고 성숙한 현실이 시작된다는 믿음에도 있다. 공원 안의 유치함을 비웃는 사람은 바깥의 자기 역할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놀이가 끝난 뒤 돌아가는 정상성 역시 하나의 욕망의 구성물이라는 점이 남는다.

워터게이트에서는 부패한 인물을 제거하면 법과 체제의 일치가 회복된다는 이야기가 작동할 수 있다. 문제는 법의 실효성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어떤 제도도 모든 모순과 책임을 완전히 청산해줄 최종 보증자가 될 수 없는데, 특정 사건의 처리가 그 완전함을 잠시 보여주는 장면이 되는 데 있다. 보증 없는 제도를 유지하고 고치는 일보다, 완벽한 제도가 나쁜 한 사람 때문에 망가졌다는 이야기가 훨씬 덜 불안하다.

셋째 반전 - 불신도 대타자를 보존할 수 있다

대타자는 모든 것을 아는 실제 비밀 지휘부라는 뜻이 아니다. 법·언어·제도·타인의 기대 속에서 우리의 행위가 의미를 얻고 인정된다고 가정하는 상징적 자리다. 그 자리를 보증할 완전한 최종 권위가 없다는 것과 법이나 조직이 물리적으로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4

완벽한 제도가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그 권위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실패를 완벽한 음모의 결과로 해석하는 사람도,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우연히 놓치지 않는 유능한 중심을 상정한다. 세상이 엉망인 이유는 누군가가 너무 잘 통제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아무도 전체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더 견디기 어려운 사실을 가릴 수 있다.

보드리야르의 전략을 비밀 설계자의 계획으로만 번역하면 이런 함정에 빠진다. 효과와 의도를 구분해야 한다. 서로 싸우는 행위자들이 어떤 질서를 함께 유지한다고 해서, 그들이 같은 비밀 명령서를 공유한 것은 아니다. 비판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중앙 권력을 발명할 때, 권력은 현실에서보다 비평 속에서 더 전능해진다.

넷째 반전 - 비판에는 향유가 있다

향유(jouissance)는 단순한 재미나 행복만이 아니다. 불쾌하고 소모적인데도 반복을 떠받치는 과잉의 만족을 포함한다. 정치적 적을 향한 분노, 나만은 속지 않는다는 냉소,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도덕적 흥분은 단순한 의견 이상의 끈기를 가질 수 있다.5

리사는 부패 의원이 처벌되었다는 뉴스에서 민주주의를 되찾는다. 관객은 그 회복을 보며 안심할 수도 있고, 지나치게 완벽한 결말을 알아보며 자신의 냉철함을 즐길 수도 있다. 작품은 두 만족을 한 장면 안에서 함께 건드린다. 순진한 리사와 영리한 관객이라는 구분도 너무 쉽게 믿을 수 없다.

《괴물》에서는 무능한 관료를 비웃는 쾌감이 있다. 그러나 그 웃음으로 국가가 원래 그렇다는 결론만 재확인하면, 구조 실패에 대한 분노는 이미 익숙한 생활감각으로 소화된다. 봉준호가 인터뷰에서 부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고 구별한 이유를 여기서 중요하게 읽을 수 있다. 재현된 냉소가 관객의 냉소를 편안하게 해주는 순간, 풍자는 자기 표적의 친구가 된다.6

보드리야르에게 되돌리는 질문

보드리야르의 강점은 현실을 보증하는 경계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는 데 있다. 허구/현실, 정상/일탈, 전쟁/비전쟁의 구획은 중립적 분류가 아니라 특정한 질서를 유지하는 효과를 낸다. 이 통찰을 버리고 사실만 정확하면 된다고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체계가 전부를 흡수한다고 강하게 말할수록, 체계 안의 균열과 행동의 차이를 설명하기 어려워질 위험이 있다. 무엇을 하든 시뮬라시옹이라면 권력이 실패한 경우와 성공한 경우, 감시가 강화된 경우와 시민의 권한이 늘어난 경우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실제 차이를 모두 회수해버리는 총체적 설명은 분석의 힘인 동시에 약점이다.7

지젝의 실재(the Real)를 대안으로 가져오더라도 화면 밖에 손대지 않은 순수 현실이 있다는 뜻으로 쓰면 안 된다. 실재는 상징화가 완전히 봉합하지 못하는 불가능성·균열과 관련된다. 피해자의 실제 고통은 구체적으로 기록해야 하지만, 고통을 실재라는 철학 용어 하나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도 부정확하다. 용어가 사람의 상처를 대신 말하기 시작하면, 비평은 다시 자신의 언어만 듣게 된다.

상호수동성 - 작품이 나 대신 분노하고 안도할 때

지젝의 「The Interpassive Subject」는 녹화기가 나 대신 영화를 즐기는 듯한 만족, TV의 웃음소리, 대신 곡하는 사람과 기도의 장치 같은 사례를 다룬다. 타인에게 노동을 맡기는 일반적인 대리와 달리 내가 즐기거나 슬퍼하거나 믿는 수동적 수행을 다른 것에 맡기는 구조다.8

이 틀을 적용하면 영화가 악인을 처벌해주는 동안 나는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정의에 참여한 듯 느끼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정치적 응용은 지젝 원문의 그 사례가 아니라 이 글의 독립적인 비유다. 모든 관객이 그렇게 반응한다고 실증한 것도 아니다. 보드리야르의 저지는 질서의 재생산과 사건의 중화를, 상호수동성은 향유와 감정의 위탁을 보므로 서로 동의어가 아니다.

다만 두 관점이 만나는 질문은 분명하다. 누가 누구 대신 믿고 분노하고 만족하는가? 작품의 비판이 내 비판을 시작시키는지, 내 몫까지 완료해주는지 물어야 한다. 좋은 정치영화를 골랐다는 만족도 정치적 실천을 대신할 수 있다. 바로 이 글을 읽고 그런 관객을 간파했다는 만족도 예외는 아니다.

실재의 사막 - 현실과 가상을 바꾸어 부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의 제1장은 영화적 이미지와 현실 경험의 얽힘을 통해 화면 뒤에 순수한 현실이 있다는 간단한 반대를 의심한다. 여기서는 확인한 2002년 스캔 10–20·31–32쪽의 논의를 요약하며, 19쪽의 검은 가림선 아래 문장을 복원하거나 인용하지 않는다. 실재와의 조우는 현실과 환상의 구도를 손쉽게 뒤집어 이제 이쪽이 진짜라고 선언하는 일이 아니다.9

걸프전의 피해를 기록하는 일과 실재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일은 서로 연결되지만 같은 일이 아니다. 피해를 철학의 생생한 예로만 쓸 때, 타인의 상처는 내 이론이 옳다는 증거로 소비된다. 그러므로 철학적 대비의 마지막 기준을 누가 더 충격적인 제목을 지었는가에 놓아서는 안 된다.

체제 바깥의 관람석을 포기하기

가장 쉬운 비판은 남들의 환상을 찾아내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비판은 그 발견으로 내가 무엇을 얻는지 묻는 것이다. 모든 것이 쇼라는 진단이 내 책임을 줄여주고,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작은 변화의 가치까지 지워준다면, 급진적인 문장은 가장 보수적인 생활을 보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믿음과 냉소 중 더 고급스러운 쪽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무엇이 실제로 바뀌었는지 확인하고, 보증이 없는데도 지속할 행동과 관계를 정하는 일이다. 이것은 이 글의 실천적 결론이지 두 철학자가 합의한 처방이 아니다.

《괴물》의 마지막 식사는 이 문제를 거창하게 해결하지 않는다. 제도의 사후 설명이 현서를 돌려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강두가 죽음과 제도의 모든 문제를 이해한 뒤에야 세주에게 밥을 주는 것도 아니다. 완전한 설명은 없고 해야 할 일이 먼저 남는다. 비평 역시 그 밥상 앞에서 잠깐 입을 다물 줄 알아야 한다. 입을 다문다는 것은 사유를 멈춘다는 뜻이 아니라, 사유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출처와 참고 URL

Footnotes

  1. 1.

    Sharpe, IEP, 정치철학·존재론·윤리의 전체 구성 및 참고문헌. ↩

  2. 2.

    같은 자료, 2a 「Criticism of Ideology as False Consciousness」·2b 「Ideological Cynicism and Belief」. ↩

  3. 3.

    같은 자료, 3a 「The Fundamental Fantasy & the Split Law」·4a–b, 환상과 현실성. ↩

  4. 4.

    같은 자료, 4d 「The Substance is Subject, the Other Does Not Exist」. ↩

  5. 5.

    같은 자료, 2c 「Jouissance as Political Factor」. 개인의 동기를 자동 판정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

  6. 6.

    봉준호, Cineaste, 부패의 익숙함과 그 수용에 관한 답변. ↩

  7. 7.

    Kellner, SEP, 보드리야르의 후기 전환과 정치적·이론적 비판. ↩

  8. 8.

    Žižek, 「The Interpassive Subject」, 「Interpassivity」「The Subject Supposed to Enjoy」. ↩

  9. 9.

    Žižek,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2002, 제1장, 10–20·31–32쪽 지정 발췌. 확인 판본과 접근 한계는 보드리야르 읽기의 출처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