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가 들통났는데 왜 민주주의의 승리로 기억되는가.

체제는 자기 잘못이 한 번도 드러나지 않을 때만 강한 것이 아니다. 최고 권력자조차 처벌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더 믿을 만해질 수 있다. 보드리야르의 도발은 폭로가 실패했다는 데 있지 않다. 폭로가 성공하는 바로 그 방식에 있다.

이 글의 목차

먼저 역사적 사건을 지우지 않기

1972년 6월 17일 워싱턴 워터게이트 복합건물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한 다섯 명이 체포되었다. 이어 선거조직과 백악관의 관련성, 수사 방해와 은폐가 드러났고, 닉슨은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하원 사법위원회의 탄핵소추 조항 채택과 하원 전체의 탄핵소추 표결은 구별해야 한다. 닉슨은 하원 전체의 표결과 상원의 탄핵재판 전에 사임했다.1

워싱턴 워터게이트 복합건물의 2013년 외관
워터게이트 복합건물, 2013년 사진. 범행 당시 현장 사진이나 수사 증거는 아니다. Farragutful, CC BY-SA 3.0 · 출처.

닉슨이 처음부터 민주당 본부 침입을 직접 지시했다고 밝혀졌다는 식의 단순 서술도 피한다. 여기서 직접 확인한 대통령도서관의 1972년 6월 23일 녹음 요약은 닉슨과 홀드먼이 CIA를 통해 FBI 수사를 막는 방안을 논의한 은폐·수사 방해의 증거다. 최초 침입 명령과 사후 은폐 관여는 같은 명제가 아니다.2

사용자가 제시한 2012년 네이버 독서노트는 사임을 1973년으로 적고 있다. 그 날짜는 교정한다. 보드리야르의 해석을 소개한다는 이유로 기초 연표까지 따라 틀릴 필요는 없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안내 역시 기록 대부분이 온라인에 공개된 것은 아니라고 밝힌다. 기록 목록을 열었다는 것과 전체 수사 기록을 검토했다는 것도 다르다.3

보통의 성공 서사

통상적 독해에서 워터게이트는 권력의 부패와 민주주의의 자기 교정 능력을 함께 보여준다. 기자가 취재하고, 의회가 조사하고, 법원이 자료를 요구하며, 대통령도 제약받는다. 잘못이 드러났다는 사실은 체제의 결함이지만, 그 잘못을 바로잡았다는 사실은 체제의 장점이 된다.

이 설명에는 실질적 근거가 있다. 독립적 조사와 권력 제한을 허구로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결말은 또 다른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 체제가 어떤 권력을 생산하는가라는 질문이, 이 체제가 얼마나 잘 고쳐지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범죄의 적발이 체제 전체의 무죄 판결로 확장될 때, 부분적 성과와 전체의 보증이 섞인다.

보드리야르의 반전 - 스캔들이 법에 바치는 경의

원문은 짧게 말한다. “The denunciation of scandal always pays homage to the law.” 작업 번역으로 스캔들의 규탄은 언제나 법에 경의를 표한다는 뜻이다.4

누군가 법을 위반했다고 고발하려면 법이 지켜져야 할 기준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권력이 부도덕했다고 분노하면 정상적인 권력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재확인된다. 보드리야르는 워터게이트가 이런 정치적 도덕을 대규모로 재주입했다고 읽는다. 디즈니랜드가 허구를 지정해 실재 원칙을 살린다면, 스캔들은 일탈을 지정해 도덕·정치 원칙을 살린다.

폭로, 예외적 위반의 분리, 정상성 회복과 반복 원인에 대한 질문의 관계를 그린 도식
폭로의 실제 성과와 정상성의 재생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모든 폭로가 무효라는 판정표가 아니라 논점 분리용 자체 도식.

더 강한 대목도 남겨야 한다. 보드리야르는 자본의 근본적 비도덕성을 계약과 합리적 교환의 언어로 길들일 수 있다는 믿음 자체를 공격한다. 자본에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비판은, 자본이 애초에 사회와 공정한 계약을 맺었다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워터게이트가 스캔들이 아니라는 도발은 범죄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외적 추문이라는 분류가 자본과 권력의 일상적 작동을 정상으로 남긴다는 주장이다.5

그가 CIA와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의 방법을 병치하는 수사도 있다. 이것을 둘이 실제로 같은 비밀 계획을 수행했다는 역사적 발견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 원문의 기능적·철학적 병치와 기관 간 공모를 입증하는 문서는 다른 종류의 근거다.

여기서 바로 생기는 반론

법에 호소하는 고발이 법의 권위를 재생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고발이 질서를 아무 변화 없이 유지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법이 권력을 실제로 제약하고 시민이 새로운 권리를 얻었다면, 원칙의 재확인에는 지배의 재생산뿐 아니라 지배를 제한하는 효과도 있을 수 있다.

보드리야르의 강점은 폭로의 낭만을 깨는 데 있다. 약점은 성공한 개혁까지 모두 같은 재생 장치로 읽으면, 무엇이 실제로 달라졌는지 구별하기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제도가 실패해도 시뮬라시옹이고 개선되어도 시뮬라시옹이라면, 이론은 세상에 질 일이 없다. 세상에 질 수 없는 이론은 때로 세상을 설명할 책임에서도 자유로워진다.

따라서 책임자 처벌, 정보 공개, 독립 감시, 권한 재배치, 피해 회복을 따로 살핀다. 이 항목들은 보드리야르의 공식 처방이 아니라, 그의 도발을 무책임한 총체적 냉소와 구별하기 위한 이 안내서의 제안이다.

한국의 냉소와 연결하면

진중권의 2003년 칼럼은 미국의 정화 서사와 한국의 이미 다 썩었다는 인식을 대조한다. 하나는 우리 체제는 고칠 수 있다는 신뢰로, 다른 하나는 어느 쪽이든 같다는 체념으로 기존 질서를 보존할 수 있다. 같은 효과가 정반대의 감정으로 나타나는 셈이다.6

그러나 미국은 신뢰, 한국은 냉소라는 국민성 도식으로 고정하면 그 칼럼도 오독하게 된다. 진중권이 말한 것은 2003년 정당 구도와 대안 정치의 배제다. 제도 비교의 실증 연구나 모든 한국인의 심리에 관한 조사 결과가 아니다.

비평가도 처벌의 관객이다

지젝의 개념을 적용하면 처벌의 장면에는 안심뿐 아니라 향유가 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공개적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정상적인 공동체 편에 있다고 확인할 수 있다. 구조를 묻자는 말이 불편한 것은 그것이 책임자를 용서해서만이 아니다. 사건을 나쁜 한 사람의 퇴장으로 끝내려던 관객 자신의 쾌감을 방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공범이라는 말로 개인의 책임을 희석해서는 안 된다. 전원이 어느 정도 연루됐다는 선언은 권력이 제일 좋아할 면죄부가 될 수 있다. 돌아갈 질문은 작다. 누가 무엇을 했고, 어떤 조건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으며, 처벌 뒤 그 조건이 바뀌었는가. 이 세 문장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이 폭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폭로의 결말을 의심하는 방법이다.

출처와 참고 URL

Footnotes

  1. 1.

    Nixon Library, 증거 전시 자료, 침입·사법위원회·사임 관련 항목. ↩

  2. 2.

    Nixon Library, Trial Tapes, 1972-06-23, Conversation 741-2. ↩

  3. 3.

    National Archives, WSPF 안내, 온라인 접근 범위 설명. ↩

  4. 4.

    Baudrillard, 「Political incantation」, 둘째 문단. 번역은 작업 번역. ↩

  5. 5.

    같은 절, 「All that capital asks…」「Capital in fact has never been linked by a contract…」 문맥. ↩

  6. 6.

    진중권, 2003년 칼럼, 본문 3–10문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