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가짜다. 그렇다면 출구 밖은 저절로 진짜가 되는가?

디즈니랜드에 들어가는 사람 대부분은 성을 중세의 진짜 성으로 믿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보드리야르의 질문이 시작된다. 허구임을 안다는 사실이 우리를 해방하는 대신, 바깥의 질서를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허가 될 수 있다.

이 글의 목차

첫 번째 독해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가장 익숙한 설명은 디즈니랜드가 미국적 가치와 신화를 아름답게 포장한다는 것이다. 개척, 해적, 미래, 가족의 즐거움은 선별되고 조화로운 축소 세계가 된다. 모순과 갈등을 놀이로 순화한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초상이라는 독해다.

보드리야르는 이 설명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더 근본적인 작동을 덮는다고 말한다. 허구 공간이 현실을 왜곡해 보여준다는 수준에 머물면, 그 바깥에는 왜곡되지 않은 현실이 있다는 전제를 그대로 보존하기 때문이다. 그가 겨냥하는 것은 성의 가짜 돌이 아니라 울타리가 나누어놓은 현실의 자격이다.1

미국 애너하임 디즈니랜드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성과 관람객, 2019년
애너하임 디즈니랜드, 2019. 보드리야르 집필 당시 사진은 아니다. CrispyCream27, CC BY-SA 4.0 · 원출처. 사진은 장소를 식별하며 방문객의 심리를 입증하지 않는다.

두 번째 독해 - 허구의 지정이 바깥을 구한다

원전의 유명한 문장을 짧게 인용하면 이렇다. “Disneyland is presented as imaginary in order to make us believe that the rest is real.” 작업 번역으로는, 디즈니랜드는 나머지를 실재라고 믿게 하기 위해 상상의 공간으로 제시된다는 뜻이다.2

보통의 도식은 현실 → 잠시 허구 체험 → 현실 복귀다. 보드리야르는 오히려 허구로 표시된 구역 → 표시되지 않은 바깥의 실재성 보증이라는 방향을 읽는다. 공원 밖의 도시·소비·자동차·주거·성공의 이미지 역시 기호와 모형으로 조직되는데, 허구는 저 안에 있다는 구획이 그 문제를 가린다는 것이다.

허구로 지정된 공원 안이 바깥 사회의 현실성을 보증하는 역설을 그린 도식
경계의 두 쪽보다, 경계를 긋는 일이 내는 효과를 본다. 자체 제작 설명도.

이것을 밖에도 광고가 많다는 상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원문은 로스앤젤레스와 미국이 더 이상 실재의 질서가 아니라 하이퍼리얼과 시뮬라시옹의 질서에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강한 주장을 약한 관찰로 둔갑시켜 쉽게 동의받으면, 사실상 논증의 위험을 지워버리는 셈이다. 우리는 그 주장을 이해한 뒤 받아들일 범위를 따로 판단해야 한다.

군중의 온기와 주차장의 고독

원문 앞부분은 의외로 구체적이다. 사람들은 밖에 차를 주차하고 안에서 줄을 서며, 출구에서 다시 흩어진다. 공원 안에서는 여러 장치가 군중을 모으고 공동의 정서를 만든다. 밖에서는 각자가 하나의 장치, 자동차로 돌아간다. 사회적 온기와 개인적 고립이 단순한 현실과 가상의 반대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생활방식으로 배치된다.3

이 장면을 읽으면 즐거움은 가짜이고 고독만 진짜라는 결론도 불충분해진다. 공원 안에서 실제로 웃었고 실제로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수 있다. 그 즐거움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온기를 소비하고 고립으로 돌아가는 순환이 어떤 사회를 정상으로 만드는지 묻는 것이다. 체제는 즐거움을 금지하는 대신 일정한 구역에서 충분히 제공할 수도 있다.

어린이의 세계가 어른을 만든다

보드리야르는 공원이 유치한 세계로 제시됨으로써 진짜 어른들은 다른 곳에 있다는 믿음을 유지한다고 쓴다. 어린이다움은 저 안에, 일과 성숙은 저 밖에 배치된다. 그러나 성인 세계의 경쟁·소유·소비에도 유아적 욕망과 의존이 작동한다면, 놀이의 격리는 성숙의 증명보다 성숙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4

놀이공원에 가는 어른은 미성숙하다는 취향 판결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놀 때와 현실을 구분한다는 성인의 자신감이 분석 대상이다. 합리적인 업무를 끝내고 잠깐 동심으로 돌아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직장에서 인정과 보상을 기다리는 방식에서는 그 구획을 넘나들 수 있다. 이것은 이 안내서의 비평적 확장이며 특정 방문객에 대한 심리 진단이 아니다.

원문은 감옥이 사회 전체의 감금적 성격을 가리듯 디즈니랜드가 현실의 허구성을 가린다고도 비유한다. 감옥 안팎의 법적·신체적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경계가 바깥의 자격을 보증하는 기능을 비교하는 것이지, 수감자의 현실과 관광객의 현실을 동등하게 만드는 설명이 아니다.

원전도 사실 검사를 면하지 않는다

같은 대목에 보드리야르는 월트 디즈니가 냉동보존되어 부활을 기다린다고 적는다.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다. Walt Disney Family Museum은 디즈니가 1966년 12월 사망한 뒤 화장되었다고 명시한다.5

이 오류는 공원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논증을 자동으로 폐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명한 철학자의 문장이라는 이유로 사실까지 보증해서도 안 된다. 사실 검사를 저급한 실증주의라고 비웃는 순간, 시뮬라크르를 비판하던 철학자의 이름이 그 자체로 진실의 대리 표지가 된다. 이 사례에서 가장 먼저 철거할 울타리는 독자와 원전 사이의 경외심일지도 모른다.

지젝적 질문 - 나는 왜 속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가

보드리야르를 읽는 사람은 방문객보다 한 단계 바깥에 섰다고 느끼기 쉽다. 남들은 놀이공원에서 안심하지만 나는 그 작동까지 안다는 만족이다. 그런데 이 만족이 내가 사는 바깥의 노동·소비·관계에 아무 변화도 만들지 않는다면, 비평은 새로운 특별 구역이 된다. 그 안에서만 모든 것을 의심하고 출구 밖에서는 원래대로 사는 것이다.

지젝의 냉소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적용한 독립 독해는 바로 여기에 붙는다. 몰라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안다는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더 편하게 참여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즐거움을 금지하는 금욕이 아니다. 즐거움과 지식이 어떤 실천을 가능하게 하고 어떤 질문을 무력화하는지, 출구 다음의 몸짓까지 보는 일이다.

출처와 참고 URL

Footnotes

  1. 1.

    보드리야르, 원문, 「Hyperreal and imaginary」, L. Marin의 이데올로기적 분석을 인정한 뒤 넘어가는 대목. ↩

  2. 2.

    같은 절, 「Disneyland is presented as imaginary…」. 인용 번역은 이 안내서의 작업 번역. ↩

  3. 3.

    같은 절, 주차장·군중·자동차의 대조가 나오는 첫 문단. ↩

  4. 4.

    같은 절, 「It is meant to be an infantile world…」와 감옥 비유. ↩

  5. 5.

    Walt Disney Family Museum, 냉동보존 오해 정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