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를 아는 냉소, 무의미를 두려워하는 관객, 진짜 좌파를 선별하는 심판.
가짜를 고발하는 사람은 진짜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진짜의 자격을 누가 판정하는가? 그리고 내가 가짜를 알아본다는 확신은, 무엇을 더 묻지 않아도 된다는 만족을 제공하는가?
이 글의 목차
먼저 세 갈래의 자료를 나눈다
2007년 한윤형의 프레시안 글은 진중권의 과거 대선자금 칼럼을 회고하지만 제목과 직접 링크는 제시하지 않는다. 별도 추적으로 찾은 2003년 「매트릭스와 돌발 사태」는 필자·시기·보드리야르·워터게이트·대선자금·부패의 불가피성·기존 정치의 지속이라는 요소가 모두 부합한다. 내용상 가장 유력한 대응 원문이지만, 한윤형이 그 제목을 명시한 것은 아니므로 회고 대상의 동일성은 미확정으로 남긴다.1
2012년 네이버 글은 진중권의 2003년 책을 정리한 독서노트다. 2011년 씨네21 글은 진중권 자신의 별도 칼럼이다. 뒤의 두 자료가 앞의 회고문 출처라는 식으로 시간 순서를 거꾸로 연결해서는 안 된다.
2003년 - 깨끗한 체제와 더러운 운명
「매트릭스와 돌발 사태」는 영화 《매트릭스》를 현대 사회의 비유로 삼는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 체계를 깨뜨릴 것처럼 보이지만, 속편에서는 그 돌발성마저 이미 입력된 것으로 제시된다. 이를 통해 저자가 묻는 것은 권력이 어떤 사실을 숨기는가만이 아니라, 어떤 일이 진정한 대안으로 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가다.2
워터게이트의 단락은 부패의 적발을 미국 민주주의의 청결함의 징표로 기억하는 역전을 논한다. 다음 단락부터 한국의 대북송금·대선자금·굿모닝시티 사건을 거론하며 개혁을 약속한 정치세력의 신앙과, 부패를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보수적 계몽을 함께 비판한다. 한쪽은 더 깨끗한 기존 정치가 가능하다고 믿고, 다른 쪽은 원래 정치란 그렇다고 안다. 둘은 싸우지만 기존 구도 바깥의 선택을 지운다는 점에서 만날 수 있다.
핵심은 본문 8문단 이후다. 진중권은 부패를 뻔히 알면서도 기존 여야에 계속 표를 던지는 사실에 진짜 매트릭스의 비밀이 있다고 말하고, 당시 민주노동당의 배제와 언론적 비가시화를 논한다. 끝의 호감도·지지도 수치는 칼럼이 제시한 당시 주장으로만 읽는다. 여기서는 원 조사기관·표본을 확인하지 않았으므로 그 수치로 오늘날 정치적 효과를 계산하지 않는다.3
프레시안에 실린 어차피 정치인들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문장은 확인한 2003년 원문에 그대로 나오지 않는다. 원문에는 부정과 부패를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취지와 기존 정당에 계속 투표한다는 논의가 있다. 따라서 프레시안의 문장은 한윤형의 요약으로 다루지, 진중권의 축자 발언으로 재인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지젝적 전환은 분명하다. 폭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폭로가 이미 체제를 움직이는 연료가 되었을 가능성이다. 더 많이 알면 벗어날 수 있다는 약속이 무너진다. 그러나 이 발견을 모두 똑같다는 체념으로 소비하면, 비판자는 자신이 분석한 저지 작동을 한 번 더 수행한다.
2012년 독서노트 - 원본이 복제를 닮기 시작한다
swissian의 네이버 글은 2012년 12월 18일 독서모임 자료로,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257–279쪽의 보드리야르 부분을 정리한다고 밝힌다. 책의 정식 부제는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다. 저자 진중권, 아트북스, 2003년 9월 15일, ISBN 9788989800217이라는 서지는 서점 페이지와 대조했다. 다만 책 인쇄본의 해당 전 쪽을 직접 열람한 것은 아니다.4

독서노트의 출발점은 복제기술이 작품을 베끼는 도구를 넘어 창작과 세계의 경험 자체를 바꾼다는 것이다. 사진처럼 보이도록 회화를 그리는 극사실주의, 카메라 앞에서 보일 삶을 먼저 구성하는 행동은 원본이 복제를 따라가는 전도를 설명한다. 이때 극사실주의 회화 양식과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은 연결되지만 같은 개념은 아니다.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 모두가 그의 철학 전체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맥루언의 매체론은 메시지의 내용만이 아니라 매체가 지각과 사회환경을 바꾼다는 점을 강조한다. 노트는 이를 보드리야르가 뒤집어 인간이 매체의 확장처럼 행동하는 상황으로 설명한다. 이어 귄터 안더스의 방송 세계·팬텀·매트릭스 논의를 연결한다. 이 부분은 진중권을 경유한 사상사적 해석으로 표시한다. 안더스가 보드리야르에게 직접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전기적 인과를 이 독서노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5
관음증과 리얼리티 쇼도 중요하다. 카메라가 자연스러운 삶을 우연히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카메라에 보일 수 있는 방식으로 삶이 조직된다. 오늘의 자기연출과 연결할 수 있지만, 보드리야르가 스마트폰 플랫폼을 직접 분석한 것처럼 소급해서는 안 된다. 관찰 대상과 후대 적용의 시점을 분리해야 한다.
예술의 공모 - 작품의 비밀보다 관객의 불안을 보기
독서노트 후반은 워터게이트의 작동을 미술로 옮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유일무이한 손작업이 예술의 필수 조건이라는 믿음을 흔든다. 산업적 일상물이 작품으로 지정되는 순간,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물건 내부의 아름다움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여기서 역사적 보정이 필요하다. 《샘》은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전에 출품되었으나 전시되지 않았다. 원작은 사라졌고 후대 복제품과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이 작품의 기억을 매개한다. 아래 사진은 1964년 테이트 복제품이 아니라 1917년 사진이다.6

보드리야르의 초미학 논의를 노트는 다음처럼 전달한다. 세계의 모든 것이 미적으로 연출되면 예술만의 차이가 사라지고, 예술은 자신의 무가치와 무의미마저 특별한 가치의 표지로 유통한다. 뒤샹과 워홀의 전복을 반복하는 후대 예술이 과연 같은 힘을 갖는가라는 공격이 이어진다. 무의미해 보이는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면 내가 무지한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관객을 붙잡는다. 감춰진 깊이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의미의 부재를 보호할 수 있다는 논지다.7
이것은 현대미술은 전부 사기라는 검증된 결론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쓰면 비평은 관객에게 더 편한 면허를 준다. 이해하지 않아도 내가 옳다는 면허다. 반대로 전문가를 믿으라는 요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작품의 실제 차이를 설명하는 대신 권위에 기대는 전문가와, 작품을 보지 않은 채 권위를 조롱하는 관객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 어떤 형식·배치·역사가 이 작품에서 실제로 새로운 경험을 만드는지까지 돌아와야 한다.
원문의 예술론을 책의 직접인용처럼 보이게 재구성하지 않는다. 이 절은 회수한 독서노트의 의역과 그에 대한 독립 비평이다. 노트에 실린 벤야민·들뢰즈·안더스·보드리야르의 번역 문장 역시 원문·번역판 전체를 대조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직접인용으로 늘려 쓰지 않았다.
2011년 씨네21 - 누가 진짜 좌파를 가려내는가
「시뮬라크르의 반란」은 다른 질문에서 출발한다. 진중권은 이데아–복제–가짜 복제의 위계로 플라톤적 선별을 설명하고,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비례가 맞아 보이도록 조각의 머리를 키우는 예를 든다. 실제 비례를 보존하는 닮음과 관점에 맞춰 닮은 것처럼 보이는 효과의 차이다.8
이는 플라톤의 여러 텍스트를 현대 정치 논쟁에 적용한 압축적 해설이다. 모든 플라톤적 모사를 복제의 복제라는 하나의 문구로 환원하거나, 들뢰즈의 시뮬라크르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동의어로 처리하면 논증이 평평해진다. 『소피스트』235d–236c의 닮음 제작과 외양 제작 구별을 비교할 수 있다.9
글의 정치적 표적은 진보에 A·B·C 등급을 매겨 진짜와 위장을 솎아내려는 태도다. 누군가 완벽한 진보의 원형을 독점한 것처럼 행동하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는 검토 가능한 주장 대신 타인의 자격을 박탈하는 기준이 된다. 순수함을 지키려는 운동이 민주적 논쟁을 좁히는 역설이다.
그러나 기준에 합의하기 어렵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존재론적 결론이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칼럼의 반전은 정치적 판정권 비판으로 읽되, 엄밀한 플라톤 반증 증명처럼 소개하지 않는다.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사실·기만·정책 결과를 구분할 공적 기준이 모두 불가능해지는 것도 아니다.
글에 언급된 아리스토파네스의 《새》를 무심코 《구름》의 오기라고 고치지도 않는다. 《새》에도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1553–1564행의 영혼 소환 대목이 있다. 다만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적으로 풍자하는 대표작 《구름》과 그 짧은 대목의 역할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그에 관한 학술 논문의 초록으로 해당 대목의 존재를 확인했으며, 논문 전문 독해로 표시하지 않는다.10
진짜의 독점을 비판하는 자의 독점
세 자료가 만나는 지점은 가짜의 존재보다 판정의 자리다. 어느 부패가 예외인가. 어느 정치가 현실적인가. 어느 작품이 깊은가. 어느 진보가 진짜인가. 판정자는 분류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분류를 통해 누가 발언권과 시간을 얻는지 조직한다.
그런데 이 판정권을 비판하는 우리도 쉽게 새 심판이 된다. 순수한 좌파를 비웃는 나만 민주적이고, 현대미술의 공모를 아는 나만 속지 않았으며, 양당의 부패를 아는 나만 현실적이라는 식이다. 반전은 상대에게만 적용할 때 가장 편안하다. 이 글의 마지막 질문은 그러므로 어느 편이 진짜냐가 아니다. 내 기준을 타인이 검토하고 수정하게 할 통로가 실제로 열려 있는가다.
출처와 참고 URL
- 진중권, 「매트릭스와 돌발 사태」, 당시 《뉴스메이커》·현 《주간경향》, 웹 입력 2003-09-25. 종이 지면의 호수·발매일은 별도 미확인.
- 경향신문사 연혁: 당시 매체 제호 확인.
- 한윤형, 프레시안 글, 2007-11-12. 2003년 원문과의 내용 일치는 높지만 명시적 서지 연결은 없음.
- swissian, 2012년 독서노트, 본문 공개 진입점. 책 257–279쪽을 정리한다고 표기.
- 진중권,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아트북스, 2003. 알라딘 서지, 교보문고 서지. 서점별 쪽수 차이는 이 글에서 확정하지 않음.
- 진중권, 「시뮬라크르의 반란」, 《씨네21》793호, 2011-03-11.
- Tate, Around the Fountain, 작품 서지: 1917, replica 1964.
- Plato, 『Sophist』235d–236c, Perseus 원전·번역 진입.
- Alessandro Stavru, 「Pythagorean Topoi in Aristophanes’ Birds 1553–1564」, 2023, DOI. 이 조사에서는 초록 확인.
- 확인일: 2026-10-21. 자료의 전문 복제가 아니라 출처별 상세 의역·논점 비교·독립 비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