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과 사랑의 발명
부제
혼잣말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일
먼저 적어둘 것
이 글은 자살 사건의 세부 방법을 반복하거나, 고통을 미학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한 판결문, 한 법률신문 칼럼, 한 편의 시, 한 문학평론이 서로를 불러내는 순간을 정리하려는 글이다.
자료의 중심에는 울산지방법원 2019고합241 자살방조미수 사건 판결문이 있다. 그리고 그 판결문을 읽은 전아영 변호사의 법률신문 칼럼 「단절」, 그 칼럼 안에 인용된 이영광의 시 「사랑의 발명」, 그리고 신형철의 한겨레 글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가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 네 자료가 모두 같은 말을 다른 언어로 반복한다는 점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거창한 구원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혼잣말로 끝나게 두지 않는 일이다.
출발 자료
- 전아영, 「단절」, 법률신문, 2021-08-26.
https://www.law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2351 - 신형철,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 한겨레, 2016-08-12.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6477.html - 이영광, 「사랑의 발명」, 『나무는 간다』, 창비, 2013.
- 울산지방법원 2019고합241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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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정정
법률신문 「단절」에는 시인이 “김영광”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사랑의 발명」의 저자는 이영광이다. 이 오기는 글의 중심 의미를 바꾸지는 않지만, 공개 기록에서는 바로잡아 둔다.
왜 Passages인가
이 글은 Books에 넣기엔 너무 법적이고, wiki/Themes에 넣기엔 너무 사건적이며, 단순한 시 해석으로 닫기엔 너무 많은 자료가 서로 걸려 있다.
그래서 Passages가 맞다. 여기서 passage는 인용구이면서 통로다. 판결문의 마지막 문장이 법률신문 칼럼을 통과하고, 그 칼럼이 이영광의 시를 부르고, 신형철의 평론이 그 시를 다시 인간의 윤리로 열어젖힌다. 하나의 자료가 다른 자료로 건너가는 통로. 이 글은 바로 그 건너감의 기록이다.
1. 법률신문 「단절」 — 단절은 부재가 아니라 편리함이다
전아영 변호사의 「단절」은 울산지법 2019고합241 판결문을 읽은 뒤의 충격에서 출발한다. 칼럼은 두 청년이 죽음을 앞두고 나눈 대화에서 돈 걱정과 미안함, 이상할 정도로 순수한 배려를 읽어낸다.
여기서 단절은 단순히 “관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더 불편한 의미가 있다. 단절은 우리가 누리는 생활의 편리함이다.
비슷한 경제력의 사람을 만나고, 비슷한 취미를 공유하고, 비슷한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 세계는 꽤 매끈해진다. 그러나 그 매끈함은 생활반경 바깥의 사람들을 보지 않아도 되는 권리처럼 작동한다. 문제는 타인의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시야에서만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단절의 진짜 무서움은 “외롭다”가 아니다. 단절은 “외로운 사람을 보지 않아도 되는 구조”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속고 있다. 단절은 결핍이 아니라, 너무 자주 특권의 형식으로 주어진다.
2. 울산지방법원 2019고합241 — 법이 문학처럼 말하기 시작하는 지점
판결문은 자살방조미수 사건의 유죄 판단과 양형을 다룬다. 그러나 이 판결문은 일반적인 형사판결문보다 훨씬 길게 피고인들의 성장환경, 가족관계, 경제적 파탄, 대인관계의 단절, 상실감과 고립감을 기록한다.
이 판결문이 특별한 이유는 죄를 흐리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죄명을 적은 뒤에도 그 사람을 죄명 안에 가두지 않으려는 데 있다.
법은 사람을 분류한다. 피고인, 피해자, 공범, 증거, 양형사유. 이 분류는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하다. 사람이 사건 처리 가능한 단위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판결문은 그 축소된 사람을 다시 펼쳐 보인다.
판결문은 결국 이렇게 묻는다.
- 왜 이들은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는가.
- 왜 “힘내라”는 말은 이미 아무 의미 없는 말로 예상되었는가.
- 왜 죽음을 모의하는 대화 속에서조차 미안함과 배려가 남아 있었는가.
- 왜 SNS로 촘촘히 연결된 시대에 가장 깊은 고립이 발생하는가.
이 질문들은 법률 판단의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듯하지만, 사실은 판결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법은 행위를 판단하지만, 좋은 판결문은 행위가 발생한 세계의 균열도 기록한다.
3. 박주영 — 판사이자 작가인 사람의 양형이유
이 판결문의 재판장은 박주영 판사다. 박주영은 법관이면서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 『괄호 치고』 등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판결문은 박주영을 “판사”로만 읽으면 절반만 보인다.
작가 박주영의 핵심은 사건을 다시 이야기로 만든다는 데 있다. 보통 사건은 기사화되면 몇 줄이 된다. 동반자살 시도, 자살방조미수, 집행유예, 보호관찰. 하지만 박주영식 양형이유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왜 이들이 그 자리까지 밀려왔는지를 묻는다.
여기서 작가란 허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보지 않으려는 현실의 세부를 끝까지 보는 사람이다. 법이 피고인을 사건번호 안에 넣을 때, 작가는 그 번호 뒤의 삶을 다시 불러낸다.
물론 조심해야 할 지점도 있다. 판결문이 지나치게 문학화되면, 타인의 고통이 아름다운 문장의 재료가 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실제 위험이다. 고통을 더 잘 보이게 하겠다는 말은 언제든 고통을 더 그럴듯하게 소비하겠다는 말로 변질될 수 있다.
그런데 이 판결문은 그 위험을 어느 정도 견디는 쪽에 가깝다. 문장이 먼저 튀어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긴 사실관계, 조사자료, 자살 관련 통계와 정책 자료, 피고인의 진술이 먼저 쌓인다. 그리고 마지막에 문장이 온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장식이 아니라 기록의 압력 끝에서 나온다.
나쁜 문학적 판결문은 고통 위에 아름다운 문장을 덮는다. 좋은 문학적 판결문은 고통이 삭제되지 않도록 문장을 세운다. 이 판결문은 후자에 가깝다.
4.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는 최종 문장
판결문은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이 문장은 법률문장이라기보다 산문 문장이다. 하지만 그냥 멋있는 문장이 아니다. 판결문 전체가 이 문장을 향해 움직인다.
구조는 이렇다.
- 이 사건은 범죄다.
- 그러나 범죄 이전에 고립이 있었다.
- 고립은 개인의 약함만이 아니라 사회적 실패다.
- 자살을 막는 최소한의 행위는 거창한 제도 이전에 듣는 것이다.
- 그러므로 가장 잔인한 것은 혼잣말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여기서 “혼잣말”은 단순히 혼자 말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말이 도착하지 않는 상태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말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심지어 도움을 청해도 “힘내라”는 상투어만 돌아올 것이라는 사회적 신뢰의 붕괴다.
그래서 이 판결문은 처벌의 문서이면서 동시에 청취의 문서다. 법이 말한다. 너희가 한 일은 죄다. 그러나 동시에 법은 묻는다. 왜 너희의 말은 아무에게도 도착하지 못했는가.
5. 이영광 「사랑의 발명」 —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응급조치다
법률신문 「단절」은 여기서 이영광의 「사랑의 발명」을 떠올린다. 이 시에서 화자는 죽음 쪽으로 기울어진 사람 앞에서 너무 놀라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 한다.
이 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사랑이 원래 있었던 감정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발견되지 않는다. 발명된다. 그리고 여유 있게 발명되지도 않는다. 번개같이 발명된다.
이 말은 낭만적이지 않다. 오히려 거의 응급실의 언어에 가깝다. 누군가가 더는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은 좋은 감정의 이름이 아니라 즉시 만들어내야 하는 관계의 기술이 된다.
사랑은 “나는 네가 좋아”보다 먼저 “네 말이 내게 도착했다”에 가깝다. 이 점에서 「사랑의 발명」은 판결문의 마지막 문장과 붙는다.
- 판결문: 사람을 혼잣말하게 내버려 두지 말라.
- 시: 그 말이 도착했을 때 사랑을 발명하라.
그러니까 사랑은 감정의 고급형이 아니라 응답의 최소형이다. 조금 더 세게 말하면, 사랑은 고립된 사람 앞에서 발명되는 반-단절의 기술이다.
6. 신형철 — 재발명이 아니라 발명
신형철은 한겨레 글에서 랭보의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는 문장을 가져온다. 그러나 곧 방향을 바꾼다. 랭보가 말한 것은 재발명이다. 이미 있는 사랑의 제도와 관습을 무너뜨리고 다시 만들자는 쪽이다.
반면 이영광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재발명이 아니라 발명이다. 무너뜨릴 제도도, 다시 만들 기존의 형식도 없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순간. 누군가가 죽음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그 앞에서 나는 즉시 어떤 말을, 어떤 곁을, 어떤 관계를 만들어내야 하는 순간.
신형철은 이 시를 “무정한 신 아래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어떤 순간들의 원형”으로 읽는다. 여기서 신은 침묵하고, 세계는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면 남는 것은 인간뿐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곁에 있겠다고 결심하는 일.
이것은 종교적 언어 없이도 거의 종교적인 사건이다. 신이 없어서 인간은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에게 더 책임을 져야 한다. 무서운 건 반대다. 신의 부재가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신이 되어야 하는 부담을 남긴다.
7. 네 자료가 만나는 자리
이제 네 자료는 이렇게 맞물린다.
| 자료 | 말하는 방식 | 핵심 |
|---|---|---|
| 법률신문 「단절」 | 칼럼 | 단절은 우리가 외면하며 누리는 편리함일 수 있다. |
| 울산지법 2019고합241 | 판결문 | 고립된 사람의 말이 혼잣말로 끝나지 않게 해야 한다. |
| 이영광 「사랑의 발명」 | 시 | 죽음 앞에서 사랑은 번개같이 발명되어야 한다. |
| 신형철의 글 | 비평 | 사랑은 무정한 세계에서 인간이 인간을 붙잡는 사건이다. |
이 네 자료의 공통점은 “구원”을 크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도 여기서 완전한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보잘것없는 최소치를 말한다.
눈길을 주는 일. 귀 기울이는 일. 곁에 있는 일. 말이 도착했다는 감각을 주는 일.
그런데 바로 이 최소치가 가장 어렵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는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어서, 오히려 진짜로 듣는 사람을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알림은 넘치지만 청자는 드물다. 댓글은 많지만 응답은 희귀하다. 연결은 풍부하지만, 말은 여전히 혼잣말로 남는다.
8. 판결문과 시 사이의 이상한 번역
이 자료 묶음에서 가장 아름답고 불편한 지점은 판결문과 시가 서로를 번역한다는 데 있다.
시의 언어로 말하면, 사랑은 “번개같이” 발명되어야 한다. 법의 언어로 말하면, 사람을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비평의 언어로 말하면, 사랑은 신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인간을 살리는 원형적 사건이다. 칼럼의 언어로 말하면, 단절은 편리하지만 누군가를 끝까지 굴러가게 방치한다.
이 네 문장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윤리를 번역한다.
사랑은 좋은 위로의 말을 찾는 일이 아니다. 사랑은 누군가의 말이 허공에서 닫히지 않도록, 그 말의 도착지가 되어주는 일이다.
9. 남는 질문
이 글의 끝에서 남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더 따뜻해져야 한다” 같은 말은 너무 쉽다. 그런 말은 때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더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 나는 누구의 말을 이미 혼잣말로 만들고 있는가.
- 나는 어떤 고통을 “내 생활반경 바깥의 일”로 처리하고 있는가.
- 나는 도움 요청을 듣고도 상투적인 위로로만 돌려보낸 적이 없는가.
- 사랑을 감정으로만 이해하느라, 응답해야 하는 순간의 기술로는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여기서 사랑은 달콤한 감정이 아니라 귀찮고 불편한 노동에 가깝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내 세계의 평온한 경계를 깨는 일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랑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단절의 편리함을 사랑한다.
이게 바로 작은 이데올로기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라는 자기 이미지 속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아무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된다.
10. 한 줄로 정리하면
이 자료 묶음의 핵심은 이렇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거창한 구원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혼잣말로 끝나게 두지 않는 일이다.
법은 이것을 양형이유로 썼고, 시는 이것을 사랑의 발명이라 불렀고, 비평은 이것을 무정한 신 아래에서의 인간적 책임으로 읽었고, 칼럼은 이것을 단절된 세계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 글은 법률 노트도, 시 해석도, 비평 요약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passage다. 판결문에서 시로, 시에서 비평으로, 비평에서 다시 우리의 생활반경으로 넘어오는 통로.
그리고 그 통로의 끝에서 남는 문장은 하나다.
혼잣말하게 내버려 두지 말 것.
연결되는 노트
출처와 참고 URL
- 전아영, 「단절」, 법률신문, 2021-08-26. https://www.law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2351
- 신형철,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 한겨레, 2016-08-12.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6477.html
- 이영광, 「사랑의 발명」, 『나무는 간다』, 창비, 2013.
- YES24, 『나무는 간다』 도서 정보와 표지 이미지. https://www.yes24.com/Product/Goods/9478574
- YES24,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저자 소개와 신형철 이미지. https://www.yes24.com/Product/Goods/64431016
- 울산지방법원 2019고합241 판결문. PDF 보기
- 예스24 작가 파일: 박주영. https://www.yes24.com/product/author/269466
- 예스24 채널예스, 「박주영 판사 “법정에 선 이들에게 서사를 부여한 이유”」, 2021-11-29. https://ch.yes24.com/Article/Details/46456
- 성균관대학교 웹진, 「서로의 온기가 만나 세상을 비추기를」. https://webzine.skku.edu/skku/campus/skk_comm/people_view.do?mode=view&articleNo=1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