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은 떨어졌다. 사람들이 죽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인가?

이 제목을 폭격은 전부 촬영장에서 만든 가짜였다는 말로 읽으면 틀린다. 그러나 제목을 잘 해명했다고 해서 그 문장의 잔혹한 위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화면의 비현실성을 비판하는 철학이 정작 폭격받은 사람을 지워버리지 않는지 끝까지 물어야 한다.

이 글의 목차

어느 전쟁이며 어떤 책인가

대상은 이라크의 1990년 쿠웨이트 침공 이후 1991년 미군 주도 연합군이 수행한 걸프전이다. 2003년 이라크 침공과 구별한다. 실제 공중·지상 작전, 파괴, 점령과 퇴각이 있었으며 이를 부정하는 사실 주장은 채택하지 않는다. 미국 국무부 역사실은 작전 시작을 미국 날짜인 1월 16일로 적는다. 중동 현지의 1월 17일 표기와 시차를 무시하고 한쪽을 틀렸다고 고치지 않는다.1

보드리야르의 글은 전쟁이 끝난 뒤 붙인 하나의 충격적인 제목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Paul Patton의 영어판 서문은 전쟁 전·중·후의 세 글과 신문 게재, 확장 단행본을 구분한다.2

글의 위치제목의 변화게재와 판본
전쟁 전The Gulf War will not take place /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1991-01-04 『Libération』; 영어판 23–28쪽
전쟁 중The Gulf War: is it really taking place? / 걸프전은 정말 일어나고 있는가?일부가 1991-02-06 게재; 영어판 29–60쪽
전쟁 후The Gulf War did not take place /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일부가 1991-03-29 게재; 영어판 61–87쪽

세 글의 확장 형태가 1991년 5월 프랑스어 단행본으로 묶였고, Patton의 영어 번역·서문은 1995년에 출간되었다. 신문판 일부와 영어 단행본 전문을 같은 분량의 동일 원고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 쪽수는 1995년 영어판 인쇄 쪽수다.

부정되는 것은 폭격의 존재가 아니다

세 번째 글의 61쪽은 대량의 폭탄과 적의 마비를 언급한다. 67–68쪽도 무력화와 항복을 논한다. 따라서 그가 폭력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거나 단순히 없었다고 주장했다는 요약은 원문과 맞지 않는다. Patton은 서문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일어난 것이 우리가 전쟁이라고 부르는 그것이었는가라는 문제로 읽는다.3

1991년 쿠웨이트의 불타는 유전과 손상된 전차, 연기가 하늘을 덮은 사진
쿠웨이트 유전 화재와 손상된 전차, 1991-03-12. Jonas Jordan, USACE·미 연방정부 공공영역 자료 · 원출처. 전쟁의 물질적 흔적을 보여주는 사진이며 특정 방송 화면의 조작 여부를 입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단지 전쟁이 TV로 보도되었다는 뜻인가? 그것도 부족하다. 모든 전쟁은 어떤 방식으로든 매개된다. 매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전쟁이 없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보드리야르는 더 강하게, 작전과 정보·전문가·미디어가 결합해 무엇이 전쟁이고 승리인지 사전에 조직하는 모형, 그리고 상호 대결을 대체하는 비대칭적 처리를 문제 삼는다.

전쟁 전 - 억지의 끝이 자유로운 사건을 뜻하지 않는다

첫 글의 23–24쪽에서 그는 냉전의 상호억지가 끝난 뒤 고전적 전쟁이 귀환한다는 기대를 의심한다. 적과 맞서는 전사들의 대결보다 인질·협박·정보의 장면이 전면에 놓인다. 시청자는 자유로운 외부 관찰자라기보다, 곧 무언가 일어날 것이라는 뉴스의 긴장에 붙들린 존재로 묘사된다.4

이 논증에서 뉴스는 이미 일어난 일을 전달하는 창만이 아니다. 기다림과 예상, 위협의 시간을 조직한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우리는 병력과 무기, 시나리오와 전문가의 해설을 통해 무엇이 일어나야 하는지 배운다. 사건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사건의 자리는 이미 차 있다.

그러나 첫 제목은 실제 예측의 위험도 부담한다. 군사행동이 벌어졌을 때 그것은 내가 말한 전쟁이 아니었다고만 답할 수 있다면, 어떤 경험이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가? 뒤의 글을 모두 처음부터 승리한 예언의 증거로 만들면 안 된다.

전쟁 중 - 실제 영상도 모형을 수행할 수 있다

두 번째 글의 29–32쪽은 이미지의 빈곤과 해설·홍보의 과잉을 함께 본다. 무기 체계와 전문가, 뉴스와 광고가 서로를 홍보하고 전쟁은 기술적 성능을 전시하는 장면이 된다. 35–36쪽에서는 이미 예상되고 소비된 시나리오와 사건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5

여기서 중요한 구별은 영상의 조작과 세계의 구성이다. 실제 표적 영상이라도 무엇이 보이지 않는지, 누구의 시점으로 전장을 정의하는지, 무엇을 성공적인 타격으로 분류하는지에 따라 전쟁의 공적 현실성이 조직된다. 보는 사람은 정보를 많이 받는 동시에 그 정보가 정해놓은 역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물질적 전쟁, 매체와 군사 모형, 피해와 책임의 검토를 구분한 도식
사건의 존재와 사건이 전쟁으로 나타나는 방식은 구별된다. 두 층위를 구별한다고 어느 한쪽을 지워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체 설명도.

따라서 이 논의를 CNN 화면이 모두 위조됐다는 주장으로 바꾸면 분석은 오히려 얕아진다. 진짜와 가짜 영상을 분류하는 일을 넘어, 진짜 영상이 어떤 전쟁 모형을 작동시키는지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확인은 계속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프레임의 권력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전쟁 후 - 적을 만나지 않고 표적을 처리한다는 역설

세 번째 글은 압도적 기술과 전력의 비대칭을 본다. 62쪽에서 전쟁을 적대적·파괴적이지만 이원적인 관계로 규정하고, 61–68쪽에서는 상대가 역전 가능한 적으로 만나지기보다 프로그램 안의 처리 대상처럼 무력화되는 상황을 논한다. 84–86쪽의 세계 질서 논의는 환원되지 않는 타자를 길들이고 중화하는 작동으로 이어진다.6

이때 미리 이긴 전쟁이라는 말은 실제로 아무 위험과 저항이 없었다는 통계적 평가로 쓰기보다, 승리와 적대의 의미가 작전 모형에 사전 배당된다는 주장으로 읽어야 한다. 적은 나의 결정을 바꿀 타자가 아니라 모델이 계산한 반응의 묶음으로 다뤄진다. 파괴는 엄청난데 대결의 상호성은 사라진다는 역설이다.

이 설명은 승자의 깨끗한 전쟁 이미지를 비판할 힘을 갖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방적인 살상이 왜 전쟁이 아니게 되는가라는 문제도 남긴다. 압도적 우위 아래의 폭력을 전쟁의 부재라고 부르면, 역설적으로 승자가 보여주지 않은 피해가 다시 언어 밖으로 밀릴 수 있다.

제목을 해명한 뒤에도 남는 반론

첫째, 서구 시청자가 비현실적으로 경험했다고 해서 폭격을 겪은 이라크인에게 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식과 매개에 관한 논증이 신체와 생활세계의 파괴를 대신할 수 없다.

둘째, 상호적인 대결이라는 전쟁 정의가 지나치게 좁을 수 있다. 일방적 포격·항복·학살은 역사적·법적 전쟁의 문제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원문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과 그 개념을 최종 판정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셋째, 상대를 양탄자 상인으로 비유하는 원문 65쪽의 수사에는 동양주의적 위험이 있다. Patton도 서문 5쪽에서 이를 지적한다. 지배적인 서구의 작전을 비판하면서도 비서구의 타자를 또 다른 상투적 이미지로 그릴 수 있다는 모순이다.7

넷째, Christopher Norris의 『Uncritical Theory』(1992)를 둘러싼 논쟁은 이 철학이 진실과 윤리적 판단의 토대를 약화시키는지 묻는다. 여기서는 Norris 원저 전문을 직접 읽지 않았고 Patton의 서문 15–17쪽이 소개하고 반박하는 범위로만 다룬다. 반론을 소개했다고 반론자의 원저 전체를 검증한 것은 아니다.

저지를 거꾸로 돌린다는 대목

67쪽에는 “Turn deterrence back against itself.”라는 문장도 있다. 작업 번역으로 저지를 그 자신에게 되돌리라는 요청이다. 따라서 보드리야르의 저지를 언제나 체제 방어 기능으로만 쓰이는 낱말이라고 단정해도 과도하다. 디즈니랜드가 현실 원칙을 재생하는 진단과, 걸프전 텍스트가 정보와 저지의 논리를 거꾸로 사용하자고 제안하는 대목은 구별해야 한다.8

그 문장 하나를 곧바로 실천 매뉴얼로 만들 수도 없다. 모든 정보를 믿지 않는 것이 저항이라는 단순한 처방은 아니다. 불신 자체가 무관심과 무책임을 유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젝적 비평 - 화면 밖에 순수한 진짜가 있다는 안심도 버리기

지젝의 개념을 적용한 독립 비평은 사건과 이미지의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대신, 현실을 조직하는 환상과 그 환상이 봉합하지 못하는 균열을 함께 묻는다. 실재를 화면 뒤의 손대지 않은 물질과 동일시하면 개념이 부정확해진다. 그렇다고 실제 죽음을 외상이나 실재라는 말로 추상화해도 안 된다.

더 불편한 질문은 비평가의 관람 위치다. 군사 브리핑을 보고 정밀한 작전에 감탄하는 사람과, 그 화면을 보며 모두 시뮬라시옹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정반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 다 타인의 죽음을 자기 세계관의 확인 자료로 소비할 수 있다. 비판적이라는 자의식은 그 소비에서 자동 면제권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돌아갈 것은 제목의 영리함보다 기록의 구체성이다. 어떤 시설이 파괴되었고, 누가 피난했고, 누가 말할 수 없었으며, 어떤 판단을 누가 책임졌는가. 보드리야르의 질문은 그 기록의 공적 형식을 의심하게 해야 한다. 기록을 더는 읽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출처와 참고 URL

Footnotes

  1. 1.

    Office of the Historian, 공식 역사 개요, 침공·공중전·지상전·2월 28일 종료. ↩

  2. 2.

    Patton, 서문 1쪽, 영어판 스캔. ↩

  3. 3.

    Baudrillard, 61·67–68쪽; Patton, 17–20쪽, 같은 판본. ↩

  4. 4.

    Baudrillard, 23–24쪽, 첫 논문. ↩

  5. 5.

    같은 책, 29–32·35–36쪽, 두 번째 논문. ↩

  6. 6.

    같은 책, 61–68·84–86쪽, 세 번째 논문. ↩

  7. 7.

    같은 책, Baudrillard 65쪽·Patton 서문 5쪽. Norris에 관해서는 Patton 15–17쪽을 경유. ↩

  8. 8.

    Baudrillard, 같은 책 67쪽. 번역은 작업 번역. ↩